Albert Camus: City of Youth
티파사의 감미로운 이슬 한 방울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우리에게 건강식품 리스트 말고도 기억해야 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젊은 날의 도시’. 흩뿌려놓은 청춘의 기억 속을 걷다 보면, 그 시절만큼이나 싱싱한 가슴으로 다시 힘을 내 살 수 있게 해주는 한 방울 이슬 같은 곳.
글 김지은 기자 사진 이재계 취재협조 주한알제리대사관 www.algerianemb.or.kr

알제리 북부에 있는 티파사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젊은 날의 도시’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어서도 가끔 티파사를 그리워하며 찾곤 했다. 물론 그 여행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당시의 세계와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돌이표 인생 속에서 한없이 무디고 감동조차 느끼지 못하는 죽은 혼의 시절에 다시 생기를 얻을 수 있었다. 알베르 카뮈의 낡은 사진첩을 훔쳐보는 마음으로 그의 산문집을 들고 길을 떠났다. ‘두 눈으로 그 무언가를 보려고 애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스무 살 청년 알베르 카뮈의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은 이상하게도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게 한다.

Dear 알베르 카뮈
당신이 사색을 즐기던 도시 오랑에 다녀와 펜을 든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다시 편지를 쓰네요. 스무 살 이후 구구절절한 편지와는 작별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당신의 도시들은 언제나 저를 감성 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네요. 사물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유난히 깊게 사유하고 시처럼 써내려간 당신의 글 때문이겠죠.
오늘 당신이 처음으로 문학적 영감을 받았던 도시 티파사에 다녀왔어요. 기원후 1세기경부터 2세기까지 로마의 항구 도시로 특히 줄리어스 시저가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궁전과 극장 그리고 원형 경기장 등을 지으며 영화가 극에 달했던 곳 말이에요. (티파사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시디라쉐드에는 그녀의 딸, 클레오파트라 8세의 무덤도 있더군요) 그 후에 기독교인들이 살다가 5세기 초에 문화파괴범으로 악명 높은 반달족이 장악하면서 성곽과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파괴했죠. 어린 당신이 찾았을 때 잔해들만 남아있어 폐허처럼 보였던 서쪽 로마 유적지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입장권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더군요.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당신이 말했던 잘 구워진 빵을 닮은 돌기둥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방치되어 있었어요. 무리지어 놀러 온 청년들이 그 위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살짝 만져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수많은 나라의 문화유산과는 대조적이었죠.
당신은 이 돌들이 한때 인간에 의해 닦여져 건물 일부로 존재하다가 반드러운 손때를 벗고 자연 속으로 돌아왔다고 했어요. 어느 봄날, 그곳을 찾은 당신의 눈에 쏟아져 내리는 빛 속의 반짝이던 돌들은 마치 봄과 결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죠. 맞아요, 죽음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해요. 그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당신은 이곳에서 솔직한 언어로만 말하기로 했어요. 이를테면 ‘바다와 산 그리고 꽃’을 붉은 것, 푸른 것, 초록빛 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었죠. 혹은 ‘코밑에 유향 나무 열매를 으스러뜨려 문지르니 향이 정말 좋다’는 표현을 구태여 디오니소스 신화와 연결해 고상하게 꾸미는 것을 자제했어요.
아마도 당신은 세상 대부분의 청년이 그렇듯, 가식 없는 본연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비록 몸의 근육은 팽팽했지만 저녁나절이면 가슴속에 가벼운 불안이 찾아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은 차라리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고, 어떤 이들의 교묘한 처세술 못지않은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부딪혀가며 깨우치리라 다짐했죠.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법한 미심쩍음의 파편들은 따사로운 봄 햇살이 거두어 갔고요. 그 후, 티파사라는 도시는 알베르 카뮈 젊은 날의 솔직하고 건강했던 고뇌, 그리고 당당한 자신감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된 것이죠.

조건 없이 사랑할 권리
유적지 반대편에는 대형묘지가 있더군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당신의 기념비를 발견했어요. 돌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죠. “나는 어떠한 제약 없이 사랑할 권리야말로 영광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면서 알제리 태생인 당신은 알제리 독립운동 당시 다수의 알제리인에게 비난을 받았어요. 알제리 독립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이에 대해 당신은 ‘누구나 알제리를 조건 없이 사랑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거죠. 이 기념비가 다른 도시가 아닌 티파사에 세워졌다는 것은 명실상부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도시라는 것을 뜻하겠죠.
그러고 보니 폐허와 봄의 결혼 말고도 당신이 맺어준 결혼이 또 하나 있었죠. 바로 티파사의 지중해와 하늘의 결혼! 당신은 전라의 몸으로 대지의 향기가 배어 있는 몸을 바닷물에 던졌어요. 땅의 정기를 바다에 씻으며 당신 피부 위에서 둘을 맺어주기 위함이었죠. 마치 어색해하는 어른 남녀의 두 손을 이끌어 곱게 포개어주는 어린아이처럼 친절하게도 말이에요. 티파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생각이고 행동이었죠. 누가 뭐래도 알제리를 배경으로 쓴 당신의 수많은 책에는 그러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어요. 당신의 문장을 읽은 전 세계의 독자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걸요.

젊음의 묘약을 마시러 가는 길
당신이 두 번째로 티파사를 찾은 건 청춘의 끝자락에 서 있을 때, 그러니까 삼십 대였어요. 그리고 사십 대가 되어서 또 한 번 이곳을 찾았죠. 당신의 겉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겠지만 티파사를 찾을 때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어요. 마치 젊음의 묘약을 마시러 가듯 설레었죠. 여러 해 동안 마음속에 쌓여있던 미칠듯한 분노와 어둠이 천천히 녹아내렸고, 오래전부터 멎어버린 심장이 가만가만 뛰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더군요.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그런데 한번 다녀온 곳을 왜 또 가겠는가? 매번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처럼 좋아하는 도시를 재차 방문하곤 하는 타입이죠. 풍경이란 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마다 바뀔 뿐 아니라 오전, 오후, 새벽……. 등의 시간대에 따라서도 모두 다르니까요.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다시 찾았을 때에는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때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첫눈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기도 하죠. 아마 서쪽 로마유적지 입구와 작은 마켓을 끼고 연결되는 한 유적지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랬을 거예요. 주변 풍경이 과거와 비교하면 너무 많이 변했거든요. 공동 목욕탕으로 쓰이던 건물인데, 현재는 ‘로마나Romana’라는 레스토랑의 멋진 뷰 역할을 하죠. 야외 테라스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며 해산물 요리를 시켰는데, 마치 우리나라 고구려 시대의 성곽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하더군요. 이런 말 하면 믿을지 모르겠지만, 음식의 맛까지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게다가 유적 위에 앉아 있는 새를 잡으러 살금살금 벽을 기어오르는 고양이와 알고도 모르는 척 일부러 기다렸다가 고양이가 손을 뻗으면 도망치곤 하는 새의 ‘유적 레이스’는 웬만한 쇼보다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세상이란 게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예전에 갔던 곳이 더 궁금해지는 거 아니겠어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도 눈치챌 수 있는 거고요. 게다가 다행인 건 그 풍경이 변했다고 해서 예전 추억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젊은 시절 자주 기대앉아 사색에 잠기던 나무가 없어졌다고 해도 두 눈을 감으면 살아나는 환영까지 베어진 건 아니니까요. 물론 당신의 경우, 젊은 날의 도시가 티파사라는 것은 매우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군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물이니 앞으로 지금처럼 유지될 뿐, 자연이 시기하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누구에게나 있을 젊은 날의 도시
당신의 젊은 날의 도시를 거닐다 보니 오히려 제 젊음의 조각들이 생생히 부풀어 올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더군요. 피타사의 로맨틱한 폐허에 비하면 시시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도 신촌이라는 젊은 날의 도시가 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스무 살의 가을, 그 작은 골목길들을 걷고 또 걸었어요. 방향을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종종 길을 잃기도 했죠. 하지만 그 상황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마냥 걷기만 했어요. 두 갈래 길이 나오면 마음에 드는 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그만이었죠. 하지만 단순한 행동과 달리 머릿속은 꽤 복잡했던 것 같아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젊은 날의 고민이었죠. 누군가와 함께 그 길을 걷곤 했지만 서로 주고받은 대화보다 혼자 했던 생각이 지금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자아가 두 개인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던 것도 같아요. 가끔 시원한 가을바람이 두 볼을 스칠 때, 고민에 대한 답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했는데, 달 뜬 마음으로 옆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그렇지만’으로 시작되는 대답이 다시 한 번 저를 혼란에 빠뜨렸죠. 하지만 제가 찾아낸 답을 버리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골목의 바람이 옆에 있던 사람보다 저와 훨씬 더 가까웠기 때문이겠죠. 당신을 감싸주던 티파사의 햇살처럼 말이에요.
한동안 신촌의 골목길을 잊고 있다가 언젠가 다시 찾은 적이 있어요. 낯선 곳으로 길을 떠나기 전, 손가락으로 지도를 정확히 짚어보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죠. 충동이라는 단어와 멀어지는 시기이기도 했고요.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팠고, 길을 헤매면 가슴이 답답했죠.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찾은 골목길에서 그 바람을 다시 만난 거예요. 새로 지어 올린 건물들로 길의 모양은 달라져 있었지만, 확실히 과거의 그 바람이었어요. 대학가를 떠다니는 뜨거운 날숨과 청춘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싸구려 삼겹살의 향기가 뒤섞인 선선한 가을바람.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가슴이 뛰었죠.

겨울 속에서 발견한 여름
티파사를 떠나기 전, 유적지 근처에 있는 작은 항구에 들렀어요. 수많은 어부가 출항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먼바다로 떠나는 그들의 젊음의 도시는 과연 어디일까요? 어쩌면 바다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티파사의 햇살과 작은 골목길의 바람처럼 특별한 파도의 진동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반면 어부인 아버지를 배웅하는 아이들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먼 훗날 젊음의 도시로 티파사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요.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몇 청년들은 저녁 하늘 위로 이상하리만큼 일찍 떠오른 창백한 달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더군요. 당신은 티파사를 그리워하는 것이, 즉 자신의 스무 살 적에 사랑했거나 강렬하게 즐겼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나이 든 사람의 커다란 광기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떤 신선함과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그렇게 전취한 빛을 가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힘을 내 살아갈 수 있다고 했죠. 이 청년들도 먼 훗날 불현듯 삶이 힘겨워질 때 이 항구를 다시 찾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드네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세월에 수긍하고, 젊은 날의 열정을 한낮 멋모르던 시절의 객기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죠. 그리고 미지근한 보리차처럼 현실을 살아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운이 없는 거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에요. 그들이 당신처럼 하루빨리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마음속에도 신선함과 기쁨의 샘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여름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PS
해외는 자주 드나들면서 가까운 신촌의 골목길은 잘 가지 않게 되네요. 어쩌면 약을 너무 자주 먹으면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효과가 떨어질까 봐 일부로 그러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올가을,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요즘 삶에 대한 애정의 농도가 살짝 짙어질 필요가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