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월간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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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호]     대륙분류 : [아시아]     국가분류 : [대한민국]     도시분류 :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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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IELD] 페달 밟고 경주 라이딩

Gyeongju Riding

페달 밟고 경주 나들이

 

고개만 돌리면 마주치는 황금빛 논과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의 도시 경주. 이 아름다운 도시는 느긋한 걸음으로 감상해야 그 맛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다. 하지만 자전거의 바퀴 구르는 속도에 맞춰 아쉽게 스쳐가는 풍경으로 보는 경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한 번 구르면 서너 발짝은 나아갈 수 있으니, 도보로는 버겁고 자동차로는 싱거울 수 있는 경주를 만끽할 가을의 지혜다.

글 이소윤 기자 사진 최은주 기자 취재협조 경주남산연구소 www.kjnamsan.org, 스토리발전소 www.storymarketing.co.kr

 

서울 토박이인 사람에게 서울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거리를 메운 자동차와 빌딩 숲 사이에 놓인 남대문이나 경복궁 담장 위로 세련된 도심이 빼꼼 보일 때 문득 서울이 사랑스러워진다. 서울이 이 정도인데 경주는 오죽할까. 발등에 치이는 것이 고분이요, 땅만 파면 유적들이 쏟아지는 경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도시다. 경주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수학여행’ 때 필수로 방문했던 불국사와 석굴암을 당연히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착한 경주에서 기자는 엉뚱한 것에 반하고 말았다. 주변으로 선도산, 소금강산, 토함산이 둘러싸고 있는 이 아늑한 분지는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시선이 탁 트이는 평화로운 평지의 연속이다. 논밭과 길거리 어디에서든 나이가 지긋한 경주 토박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움직였다. 그래서 경주 시내로 들어서 가장 먼저 자전거 대여소를 찾았다.

고분에서 맡는 커피향기

경주하면 중심가를 벗어난 외곽에 위치한 유명 문화재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경주 시내만 해도 볼거리는 풍부하다. 또 유명한 문화재들로 관광객이 많이 몰리기 마련인지라 한적한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시내만한 곳도 없다. 시내 중심에 자리한 대릉원 앞의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완만한 도로변을 따라 ‘봉황로’로 향했다. 봉황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는 ‘봉황대’ 맞은편에 위치하는 아담한 거리다. 얼마 전부터 경주시는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에서 제일 활발한 시가지였던 이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서울의 인사동 거리를 상상하고 방문한다면 첫 인상에 살짝 실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찬찬히 길 주변에 자리한 상점들을 들여다보면 운치 있는 전통 찻집이나 다방, 갓 생긴 따끈한 갤러리와 개인 미술 작품들을 판매 겸 전시하는 공방과 골동품 가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손재주 좋은 경주 사람들의 솜씨를 한 골목만 속속들이 구경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길 중간 중간 세워져 있는 동물 모양의 토우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공방들 사이에 지어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커피숍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근방으로 최근 많이 생겨나고 있는 커피숍들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곳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겨보길 바란다. 단,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하자. 아직 뜨거운 커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곳은 바로 앞 ‘노동동·노서동 고분공원’이다. 대릉원과 매우 인접해있지만 이곳은 입장료와 울타리가 없는 말 그대로의 공원.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들이 그렇게 도심 한가운데 여전히 우뚝 솟아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책을 하고 잠시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입장료를 내야하는 고분에는 자전거를 들고 들어갈 수 없지만 이곳은 모든 것이 마음대로다. 아무 잔디밭에나 자전거를 풀썩 던져놓고 그늘에 앉아 고분의 청순한 곡선과 어우러지는 사람과 도시의 삶을 지긋이 바라보면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노동동 고분공원에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크기의 봉황대를 만날 수 있다. 무덤이라기 보단 작은 동산에 가까운 봉황대 위에는 우람한 고목나무 몇 그루가 자태를 뽐낸다. 경주 시내는 봉황대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기에 시내 어디에서도 그 정수리를 훔쳐볼 수 있다.

 

 소박한 왕의 위엄, 진평왕릉

삶과 죽음이 태연하게 공존하고 있는 현대의 경주를 시내에서 목격한 뒤, 하루 동안 대여한 자전거로 제대로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의 많은 관광지를 뒤로 하고 보문단지가 위치한 동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경주는 웬만한 도보에 붉은색 보도블록으로 자전거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한적한 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리는 여정의 목적지는 ‘진평왕릉’이었다. 유홍준 선생이 고른 경주의 숨은 비경 3곳 중 하나인 이곳은 경주 낭산 서쪽의 보문동 평지에 자리한다.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소박한 시멘트 논길이 나오기 시작하면 거의 가까워진 것이다. 도로변에 위치한 곳이 아니라 동네사람들만 찾는다는 숨은 보석 같은 공간. 진평왕은 시조 박혁거세 이후로 가장 오래 왕위에 머물렀던 임금이다. 하지만 진평왕릉은 그런 임금의 무덤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모양새가 겸손하다. 주변으로 너그럽게 펼쳐진 잔디밭 속에 부끄러운 듯 숨어있는 왕릉은 대단한 비석이나 울타리 하나 없이 늠름한 고목들만을 벗으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적 드문 이곳에서 말을 멈추면 들리는 것은 오직 바람에 스치는 벼 익는 소리와 간간히 들려오는 까치 노래뿐이다. 시내에서 출발 전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들고 와 푹신한 잔디밭에 몸을 묻은 채 멀리 달려온 휴식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한다. 좀 전의 고분공원에서 본 거대한 고분들과는 또 다른 곡선의 미학을 흘리는 왕릉을 감상하다 고개를 한 번 돌리면 황금빛 논이요, 두 번 돌리면 옹기종기 모인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5월이면 노란 꽃이 들판에 잔뜩 피어나 노란 바다와 같아진다 하니 꼭꼭 숨어있는 비경을 찾아온 보람은 두 배, 세 배로 거둬갈 것이다.

 

달빛보다 화려한 신라의 밤

진평왕릉에서 논길을 따라 내려오면 ‘황룡사지터’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경주박물관 사거리까지 난 ‘황룡사 마루길’을 내달리며 코스모스와 연신 하이파이브를 하다 보니 어느새 노을빛이 온 도시를 누르고 있었다. 밤이면 다시 태어나는 경주를 보기 위해 슬슬 페달을 힘차게 밟아야 할 시간이다. 자전거 대여소가 있던 시내 중심부에는 계림과 첨성대, 반월성, 석빙고, 내물왕릉, 안압지가 사이좋게 모여 있어 밤이면 빛나는 문화재들로 밤하늘의 별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첨성대와 계림으로 향하기 전 경주의 야경을 대표하는 ‘안압지’에 먼저 들렀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정원인 안압지는 통일시기의 화려한 궁전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곳이다. 안압지를 야경으로 유명하게 만든 일등공신은 거울처럼 잔잔한 연못이다. 못의 주변 건물들을 가지런하게 짓지 않고 직각으로 꺾기도, 불쑥 돌출을 시키기도 하여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바다처럼 넓게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상적이다. 연못 속에 수은이라도 풀어놓은 것처럼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이 물 덕분에 안압지에선 매일 밤마다 못 주변 건물의 쌍둥이가 탄생한다. 수면 위로 아롱대는 달빛에 마냥 취해보는 것도 좋지만 입구로 나와 길만 건너면 드러나는 숲 계림과 첨성대를 놓치면 경주의 야경을 모두 만끽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서린 숲 계림은 예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나무를 절대 벨 수 없었기에 스스로 명을 다한 고목들을 제외하고는 전설 속 모습 그대로이다. 이를 마주하는 첨성대는 여전히 상상보다 더 큼직한 기량으로 밤의 왕이 되어 우아하게 서있다. 일 년의 날수와 같은 돌의 수, 기본 별자리 수를 상징하는 28단의 높이와 같은 비밀들을 가득 품고 있는 최고령 천문대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늦은 밤 괜한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동남산 산책으로 화룡점정

누군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던가. 산 전체가 거대 박물관인 남산은 자연의 미에 신라의 오랜 역사와 신성한 문화재들이 뒤섞인 특별한 곳이다. 하루나 이틀 만으로는 모두 둘러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방대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남산에서 특히 동남산은 경주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치를 자랑한다. 시내에서 가장 먼저 다다를 수 있는 최치원의 ‘상서장’에서 나른한 가을볕을 받으며 해맞이 마을을 지나 남산 숲속으로 들어갔다. 만만한 산길을 올라간 지 7분여 만에 마주한 ‘부처골 감실석불좌상’은 오목하게 들어간 감실 안에서 온화하게 웃음을 띠운다. ‘할매 부처’라고도 부르는 이 불상은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부처님이지만 찾는 이가 많지 않아 그만의 수줍은 미소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아담한 크기로 친숙함을 주는 할매 부처와 달리 9미터 높이에 둘레가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바위에 다양한 조각이 새겨진 ‘부처바위’는 그 풍채가 남다르다. 바위의 네 면에 각기 다른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남면의 삼존불좌상에는 남산에 자리한 불상의 특징이 짙게 드러난다. 가운데 본존상 양 옆에 앉은 보살들은 불상에 응석이라도 부리듯 슬며시 부처에 기대고 있다. 이렇게 웃고, 장난치는 재미난 불상의 모습은 오직 경주 남산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니 힘겨운 산행도 달게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보리사 터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앞에 올라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정갈한 경주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면 숨이 트이며 한 가지 바람이 생긴다. 몇 년 뒤에 다시 찾아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마음이 말이다. 그렇게 불상 앞에서 처음으로 올려본 기도에 석불좌상은 슬며시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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