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 Hitchhiking 

 

 무일푼으로 유럽에 헤딩

영어실력도, 가진 돈도, 촘촘한 여행계획도 없이 대학생 넷은 유럽으로 떠났다. 스펙쌓기 전쟁에 뛰어들 용기 대신 일탈을 저지를 무모함으로 무장한 채.

글 이소윤 기자 사진 최은주 기자 사진제공 무비꼴라쥬 

꿈을 좇는 새로운 방법

원래 그렇게 용감하세요? “아니요” 어눌한 대답이 돌아온다. 같은 학교 영화과 학생이던 호재와 현학, 하비, 휘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방학 동안 영상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지만 게으르게 누워만 있다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결국 예정했던 돈도 절반밖에 모이지 않아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수중의 돈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탈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엄연한 청춘인데도 제대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것이 억울했던 그들에게 유럽은 또 다른 꿈, 그러나 또 돈이 문제였다. “이 돈으로 유럽까지 가봤자 얼마나 있겠어, 누워있거나 영상이나 만들고 있겠지” 현학이 의미 없이 툭 던진 그 말로 인해 단 10분 만에 성대한 계획이 완성됐다고 한다. 유럽에 위치한 호스텔의 홍보영상을 만드는 대가로 그곳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만 있다면 어느 나라의 어떤 도시에도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계획은 호스텔 홍보영상을 만들며 포트폴리오를 쌓은 후 런던에서 제 2의 비틀즈를 찾아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보자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더불어 그 모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개봉하는 것으로 마침표. 이 모든 프로젝트를 진행할 자신들에게 잉여인간을 뜻하는 ‘서플러스Surplus’라는 이름부터 붙였다. 낙천적인 잉여들은 무엇보다 기발한 이 계획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다. 그 길로 호스텔 영상을 만드는 데 사용할 DSLR과 다큐멘터리 제작용 캠코더, 노트북 한 대를 구매하고 항공권 예매 후 배낭을 꾸려 출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주다. 떠나기 직전 홍보영상의 질을 위해 영입한 세 명의 디자이너가 모은 90만원을 전 재산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다.

 

잉여들을 히치신(히치하이킹의 신)이라 불러주오

유럽에 내리자마자 파리에 위치한 모든 한인민박에 메일을 돌리며 호스텔 홍보영상이 필요한 곳을 찾았지만 기다리던 답신을 보내온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사실 유럽의 한인민박은 한국 여행자라는 고정된 수입이 있는데다 개중에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정식 숙박업소로 신고를 하지 않은 곳도 있어 유투브에 공공연히 올려질 홍보영상물이 그리 유혹적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사전조사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감행한 잉여들에겐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안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여행경비는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이대론 안되겠단 생각에 유럽 내에서도 여행자 호스텔에 가장 많이 밀집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탈리아 로마를 새로운 목적지로 정한다. 그러나 파리에서 로마까지 가는 기차를 탈 돈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남쪽에 붙어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무작정 남쪽으로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것은 없었다. 인원이 적을수록 유리하다는 생각에 팀까지 나눠가며 차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만 독한 매연만 들이킬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지 않던가. 어느새 이들에게도 히치하이킹 노하우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일단 궁극적으로 가야하는 도시까지 가는 길을 작은 단위의 도착지들로 나누고, 그 도시로 향하는 차들이 지날 수밖에 없는 도로를 찾아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최대한 크고 또렷하게 손에 적어 들고 발랄하게 시선을 잡아끌만한 행동을 취해보이는 것도 방법이다. 히치하이킹을 위해 서있는 곳은 되도록 차를 세우기 쉬운 갓길이면 좋다.

 

다시 고개 내밀던 포기라는 습관

한번 두 번을 거듭할수록 히치하이킹을 위한 요령도 늘어가고, 생각 못한 호의를 베풀어주던 사람들의 도움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덧 그들은 파리에서 남쪽 도시 니스Nice까지 약 3주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거의 프랑스를 남북횡단한 격이다.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간 로마. 로마에서라면 이 여정의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해 일주일이 넘도록 한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잉여들을 원하는 전화벨이 한통이라도 울리길 기다렸지만 시간만 더디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호재 감독은 이 당시 보금자리가 자신들에겐 최고의 야영장이었다고 말한다. 우연히 찾게 된 양 목장 언덕 뒤 공터였는데 땅도 평평하고 오가는 사람이 없어 그 누구도 이들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단돈 2만원이 남을 때까지 버틴 시간은 장장 9일. 낮에는 미리 사놓은 통조림으로 배를 채우고 저녁에는 근처 나무껍질에 불을 붙여 통조림 캔으로 라면을 끓여먹는 생활이 지속됐다. 한국의 따끈한 밥과 노곤한 잠자리를 포기하고 프로젝트를 위해 견뎌야 하는 것치고는 가혹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일주일도 넘는 시간을 버텼다. 그 끈기와 패기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무척이나 덤덤하게 그 이유를 말했다. 평소 학교생활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잉여들이 부모님도 모르게 학교까지 그만두고 떠나온 여행인데 그렇게 다시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기엔 한국에서 감당해야할 일들이 더욱 암담하게 느껴졌다고 말이다. 그 모든 마음의 짐에도 불구하고 포기 이외엔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어져가던 무렵 마지막 신호탄을 던졌다. 기대하는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던 한인민박을 대신해 외국 호스텔로 대상을 바꿔보기로 한 것이다. 정말로 포기하기 전 마지막 시도였다. 그렇게 로마에 소재한 외국 호스텔 70곳에 전부 메일을 보낸다.

 

한국의 잉여들 유럽에서 슈퍼스타 되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밖에 할 수없는 때를 버티는 순간, 이 우주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유가 다분한 기적이라도 그 당시에는 단순한 기적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잉여들의 마지막 한방에 한 호스텔이 마침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사실 잉여들은 외국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촬영을 위해 호스텔을 찾은 날, 로마로 오며 길거리 노숙도 서슴지 않았던 46일의 경험이 이들의 능력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호스텔 방의 깨끗한 변기통 하나, 2층 침대, 기본적인 편의시설들이 모두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편안함을 제공하는 모든 시설에 가장 민감하던 때를 잘 활용해 완성한 홍보영상은 호스텔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섬세한 시선 이외에도 그들의 위트 넘치는 영상은 옆집 오빠, 동생처럼 만만하던 영화초반에서의 그들을 전혀 달리 보이게 한다. 놀랍게도 이들의 첫 작품인 호스텔 ‘더 옐로우The Yellow’의 홍보영상은 잉여들 넷이 함께 완성한 첫 영상물이다. 한국에서는 단편적인 작업만 했을 뿐 어떤 결과물로 완성 지을 기회도 의지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들이 잉여인간처럼 매일 하던 게임이나 수업시간에 몰래 보던 만화책, 하염없던 웹서핑의 시간들은 자신들도 몰랐던 능력으로 축적돼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경험이 틀에 박히지 않은 연출과 기발한 시각효과, 재치 있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가능케 했다. 서플러스의 첫 작품에 매우 만족한 호스텔 측은 함께 운영하던 호텔의 홍보영상 제작까지 의뢰한다. 그렇게 그들의 잠자리는 길바닥에서 호스텔로, 그리고 호텔로 업그레드 되어갔다. 주머니 속에는 여전히 돈 한 푼 들어있지 않은데도 말이다. 자신들의 재능과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물물교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서플러스의 처음과 두 번째 작품이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잉여들은 순식간에 유럽 호스텔계에서 일약 슈퍼스타로 떠오른다. 이들의 영상을 원하는 메일이 1초에 하나씩 밀려들어오고 서로 경쟁이 붙기 시작하면서 먼저 제시하는 조건들도 점점 강해졌다. 애초에 그려왔던 계획이 현실로 이뤄지면서 터키와 영국으로 마음껏 이동할 수 있게 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꺼져있던 시간들

영화를 보고 나온 순간, 이들의 도전에 받은 감동과 동시에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던 시간의 잉여들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실제로 정확히 1년간 유럽에서 생활했던 이들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카메라에 생활을 담은 시간은 60시간으로 고작 4일 정도에 불과하다. 프로젝트라는 틀 바깥의 이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잉여들의 첫 더 옐로우 영상작업은 밤을 꼬박 샌 사흘 간 이뤄졌지만 그 뒤부터는 열흘에서 한 달까지 작업 기간으로 주어지는 시간이 늘어났다. 호스텔이 먼저 제시하는 조건들이 후해지면서 작업을 위해 머무르는 기간을 무한대로 잡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숙식제공을 넘어 용돈 식으로 건네받는 현금들도 모이면서 여행경비는 0원에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말인즉슨 작업 중인 호스텔이 위치한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든 무한대로 머무르며 자유 시간을 즐길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한다는 집착을 버렸다. 흔히들 유럽여행이라 하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관광지들을 중심으로 하루 단위의 효율적인 일정과 동선을 짜서 움직이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여행법은 잉여들에게 맞지 않았다. 물론 유명한 미술관이나 문화유적지를 위해 계획을 짜 움직인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도시를 산책하다 만난 젊은이들과 축구를 하거나, 말도 안 통하는 미용실에서 이발을 해보고, 현지 친구들이 만들어준 가정음식을 함께 먹으며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눈으로 하는 관광보단 온몸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일이 잉여들에겐 진짜 여행이었다.

 

우리들은 대단하지 않아요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무엇보다 자유로워야하는 여행에도 제한적인 개념을 대입시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기자조차 예외는 아니다. 영화를 본 후 이들의 여정이 여행이냐 프로젝트냐에 대한 고민에 잠시 빠져있었다. 특정 재능을 기본으로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한 여정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돌아온 이호재 감독의 대답은 한 마디였다. “우리들은 절대 대단하지 않아요”. 이들의 아이디어가 외국 호스텔에 먹혔을 뿐, 만약 자신들보다 더 실력 있고 부지런한 친구들이 체계적으로 준비해서 같은 여행을 떠났다면 자신들보다 일찍 안정을 찾고 더 멋진 작업물들을 남겼을 거란 얘기다. 더불어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생각도 덧붙였다. 이것은 절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누구든 여행을 떠나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만한 하나의 재능쯤은 있기 마련인데 잉여들에겐 그것이 단지 영상이었을 뿐이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이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대단한 누군가가 세운 업적을 통해 받는 감탄만이 아니라 ‘어디 나도 한번?’이라는 동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들의 여행에 주눅 드는 대신 용기를 얻는다면 당신만의 혁신적인 여행법을 만들어내는 것 쯤 시간문제다.

잉여들의 두 번째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 중이다. 이번엔 세계를 돌며 음악 하는 밴드가 되는 것이 목표다. 하비와 휘의 군복무 때문에 잠시 멈춘 지금의 이 공백기가 지나면 잉여들은 또 홀연히 한국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러다 정말 몇 년 뒤 서플러스가 영국에서 제 2의 비틀즈로 추앙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스스로 성공하리란 확신을 품은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니까.

 

 

 

 

영화를 한편 봤다. 포스터에는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본 적 없는 젊은 남자들이 길바닥에 여행배낭과 함께 누워있다. 기대라기 보단 호기심으로 봤던 영화가 끝나자마자 주인공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끓어 오르는 패기에 무슨 일이라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던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11월말에 개봉해 현재 2만4천3백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주인공인 이호재, 이현학, 하승엽, 김휘 네 청년이 계획한 비장한 프로젝트를 유럽에서 실행하며 1년 동안 겪은 사건사고들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글로 읽거나 사진으로 보는 것에만 익숙하던 기자에게 여행의 순간들이 있는 그대로 영상으로 남겨진 영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마터면 아무 항공권이나 편도로 예매할 뻔했으니 여행 자극제로서의 역할까지 톡톡히 하는 셈이다. 영화의 유쾌함 때문에 네 주인공들이 이미 오래 알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걱정이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인터뷰를 위해 이호재 감독과 이현학을 만나던 날, 다짜고짜 덥석 손부터 잡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