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Through the Daily Life
오키나와의 일상을 따라 걷다.

고즈넉이 보이는 돌담길과 네온사인 빛으로 가득한 시내.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두 길을 느긋한 이곳의 사람들처럼 천천히 거닐었다.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풍성하고 기름진 식탁 앞에 이르렀다.
두 다리와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실은 지극히 평범한 오키나와 일상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글 김수현 기자 사진 최은주 기자 취재협조 오키나와관광컨벤션뷰로 www.visitokinawa.jp

Okinawa :: Street & Food
걷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이다. 좁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9시부터 6시까지 키보드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별 다른 움직임 없는 이들에게는 걷는 것이야말로 숨쉬기를 제외한 유일한 운동일 테다.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는 봄날의 산책. 긴긴 겨울 동안 그토록 바라왔던 것인데도 막상 봄바람이 불면 함께 따라오는 춘곤증 탓에 산책은커녕 잠을 청하기 바쁘다. 그래서 나섰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이는 오키나와의 길로. 아늑한 돌담길과 화려한 불빛으로 잠들 줄을 모르는 도심 한복판을 이곳의 주민처럼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냄새에 마음을 뺏기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였다. 걷는다는 것, 행복해진다는 것.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길, 킨죠쵸 이시타다미
오키나와 사람들, 술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해 한국인과 비슷한 점이 많다지만 사소한 것을 하나 말해볼까. 소소한 데에도 의미 붙이기를 참 좋아한다는 거. 이를테면 요나구니지마는 일본 최남단의 섬, 이리오모테의 평범한 신호등에 최남단 신호등과 같은 별명을 달아주는 것 말이다. 혹시라도 기자에게 유일함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오키나와 어딘가에 붙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킨죠쵸 이시타다미金城町石畳道를 ‘오키나와에서 최고로 사랑스러운 길’이라 말하고 싶다.
1월에 만개하는 오키나와 벚꽃이 올해는 날씨가 쌀쌀한 탓에 이제야 서서히 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벚꽃을 보며 어딘가에 돌담길이라도 있으면 정말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꿈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길이 바로 킨죠쵸 이시타다미였다. 일본 내에서도 걷고 싶은 거리 100선에 꼽힌 이 길은 슈리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 초, 오키나와에서 남부로 통하는 도로이자 귀족들이 왕궁으로 향할 때 이용된 이곳은 300여 미터에 이르는 짧은 길이지만 혼자 여유를 즐기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연인들을 위한 산책로로 제격이다.
경사는 다소 가파르지만 주변에 운치 있는 가옥들과 지붕 위에 올라와 있는 시사를 구경하며 천천히 거닐다보면 올라가고 내려오며 다리 아플 일은 없겠다. 그런데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TV 소설 시리즈 <츄라상>의 배경이 된 곳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관절염 약 광고에 등장하며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광고의 내용은 이렇다. 가파른 돌길을 힘겹게 걷는 한 관절염 환자가 파스를 붙이고 나서 경쾌하게 이곳을 누빈다는 것. 조용하고 아늑한 거리를 배경으로 하기에는 심히 유쾌한 광고지만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그만큼 걷고 싶은 길이라고 해석해도 되려나. 비가 온 뒤라 조금은 미끄럽지만 초록색으로 이끼가 낀 오래된 석회암은 이 길의 멋을 더하는 요소다. 마지막으로 아래쪽에 있는 휴
게소 툇마루에 앉아 나하 시내를 내려다보면 가슴 속에 묵혀두었던 근심과 걱정 따위는 어느새 따뜻한 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간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국제거리의 오늘
등 뒤로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한적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도 역시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사람구경이 하고 싶어져 온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오키나와에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곳을 찾는다면 역시 나하의 국제거리国際通り가 답이다. 기적의 1마일이라고도 불리는 1.6킬로미터의 길은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오키나와의 대부분은 초토화됐다. 폐허가 돼 온전한 것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 어느 날부터인가 천막으로 된 상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가게가 생겼다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다시 한 번 오키나와 부흥이 일고 있음을 알리는 움직임이었다. 국제거리라는 명칭은 당시 전쟁에서 종군기자였던 아니마루를 기리며
설립한 국제극장이 거리 중간에 있어 붙여진 것. 현재 극장은 사라졌고 1층에는 로손 편의점이 들어오는 등 많은 부분이 신식 건물과 숍들로 대체됐지만 그 시절 이 거리를 지배했던 활기는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식 간판과 영어식 간판이 중간중간 적절히 섞인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낯이 익다. 하지만 기적의 1마일을 따라 심어져 있는 야자수가 이곳이 오키나와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국제거리임을 알려준다. 길에는 여타 다른 일본 번화가에서는 느끼지 못할 독특한 분위기가 서려 있어 현지 주민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중간에 위치한 평화거리는 수많은 잡화와 볼거리가 모여있는 시장으로 잠시라도 시간을 내 들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제각기 어디서 온건 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오키나와 방언과는 다른 억양으로 밤낮없이 호객을 위해 목청을 돋우니 이곳에서만큼은 낯선 도시에서 느껴지는 서먹함을 마주할 일은 없다.

먹는 즐거움 그 이상의 의미
길을 걷다 보니 허기가 지고, 허기가 지니 코로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집집마다, 식당마다 풍겨오는 달콤한 음식냄새에 오키나와 사람들의 식탁이 궁금해진다. 온난한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느긋하다. 연중 온화한 날씨 덕에 농사가 잘 돼 음식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 오키나와 역시 기후와 이들의 습성만을 두고 본다면 다른 더운 지역과 별다를 바 없지만 이들에게 음식이란 미각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유럽의 설탕값이 폭등할 것을 예상한 일본 정부는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오키나와의 농지 대부분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했다. 식량을 생산하던 공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찍 전쟁이 끝나 경기 회복이 빨랐고 사탕수수로 인한 이익이 그다지 크지 않아 오키나와 전역에 기근이 생겼다. 농지가 전부 사탕수수밭이 된 탓에 먹을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허기 앞에서 무너진 사람들은 급기야 독이 그대로 남은 소철을 따 먹었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오키나와 전역에 혼란과 재앙으로 밀어 넣은 소철지옥의 아픔이 어떤 건지 아는 이들에게 음식이란 즐거움을 떠나 생사와도 직결된 중요한 것.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은 모든 식재료를 소중히 여기며 류큐의 전통 요리와 음식문화를 맥맥이 이어오고 있다.

우치난츄의 식탁을 책임지는 류큐요리
이들의 풍성한 밥상은 류큐왕국 시절, 교류를 통해 아시아 제국들의 여러 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함께 발전했다. 중국과 닮았지만 다르고 일본과는 또 거리가 먼 동양요리의 지혜를 결집한 산물로 그 풍미가 독특해 일본 내에서도 지방 향토 요리가 아닌 하나의 민족 요리로 여겨지고 있다. 재료를 이것저것 섞은 찬푸르 요리와
돼지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이고 재료다. 특히나 고야는 가장 인기 있는 채소로 즙을 내서도 먹고 차로 마시기도 한다. 가장 대중적인 고야요리로는 두부와 갖가지 채소들 한데 볶은 고야찬푸르가 있는데 이것만 있다면 오키나와 식 상차림의 반은 완성이다. 돼지는 울음소리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 내장, 귀, 가죽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위가 음식으로 승화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식재료이며 오키나와에서 고기라 하면 돼지고기를 일컬을 만큼 류큐요리는 돼지로 시작해서 돼지로 끝난다. 또한 오키나와에서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오키나와 소바다. 오키나와인에게 소바란 소울푸드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소바를 먹는 소바데이도 있을 만큼 소바에 대한 사랑이 깊다 역시 주 재료는 돼지지만 소바라는 이름 때문에 메밀 소바를 상상하지는 말 것. 면이 메밀이 아닌 밀가루 100퍼센트로 만들어진 것이 오키나와 소바의 특징이니까. 각 섬마다 조리방식에는 약간에 차이가 있지만 구수한 국물과 두툼한 돼지고기는 어느 곳을 가나 동일하다.
오키나와에서 오랜 세월을 산 우치난츄들에게는 ‘음식이 곧 약’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인데, 이는 현재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장수현 중 하나로 오키나와의 이름을 올리게 했다. 물론 2차 대전 이후로 그들의 식생활에는 조금씩 변화가 오고 있으며 27년간 미군의 통치하에 서양의 음식이 들어와 현재 치즈와 버터는 오키나와 신세대들이 마트에서 즐겨 구입하는 상품이 됐다. 일본으로 반환된 이후에는 일본 요리와도 많이 어우러졌지만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전통 위에 새로운 문화를 쌓아 올리고 있기에 여전히 오키나와 사람들의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밥상은 류큐요리가 책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