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ine Day in Porvoo

핀란드의 중세도시 포르보에서의 어느 멋진 하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중세시대를 핀란드의 남부 도시 포르보에서 마주했다. 아직도 발은 자갈로 이어진 바닥을 기억하고 있고 마음은 목초지를 뛰어다니는 하얀 소와 아름다운 강변을 떠다니는 배와 함께다. 
작은 도시 포르보에서 보낸 짧지만 오래도록 기억될 끝나지 않은 하루의 이야기.
글과 사진 김수현 기자 취재협조 핀에어 www.finnair.com/kr

1 포르보의 구시가지. 어느 하나 모난 건물 없이 모두가 아름답다. 
2 구시가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수공예품을 파는 샵들이다. 핀란드의 디자인을 담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 차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게 된다. 
3 심플한 포르보 대성당의 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정교한 중세양식의 장식을 만날 수 있다. 
4 구시가의 중심이 되는 시청사와 광장. 
5 자갈로 만들어진 언덕이 많아 포르보 여행에서 편한 신발은 필수다. 
6 여유롭게 도시를 만끽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카페테리아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머릿속이 잠시 복잡했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고작 한 시간 떨어진 곳인데도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같은 21세기를 살고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가서다. 오히려 동화 속 배경이라고 말하는게 현실적일, 이것이 포르보Porvoo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핀란드에 있는 여섯 개 중세마을 중 하나인 포르보에서 차가운 북유럽의 이미지는 자갈이 깔린 바닥과 아기자기한 건물로 단숨에 지워졌다. 때로는 평화로운 중세마을 같다가도 신
시가에서 느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세련된 풍경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작은 도시 여행이 반나절이면 충분하다는 건 포르보의 오랜 역사보다 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낭만이 묻어나는 중세마을

중세의 분위기를 고이 간직한 포르보의 시작은 1346년으로 핀란드 전체를 통틀어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구시가지Old Town에 위치한 건물들은 예상보다 지나치게 깨끗했다. 마치 최근에 새로 지은 듯 했는데 반쯤은 맞다. 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760년에 도시 전체가 큰 화재를 입었다고 한다. 그 불씨의 시발점은 전쟁이나 약탈에 의해서가 아닌 생선수프를 만들던 한 아주머니의
집. 당시 대부분의 집은 불에 타기 쉬운 목재로 지어졌었고 심지어 간격조차 좁게 다닥다닥 붙어있었기에 불은 삽시간에 전역으로 퍼졌다. 몇 개를 제외한 구시가의 건물이 모두 재가 된 안타까운 일을 겪었지만 웬일인지 포르보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소재와 형태의 가옥을 고집했고 복원을 시도했다. 덕분에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핀란드식 중세도시를 언제든 만나볼 수 있다.

나지막한 언덕과 좁은 골목으로 가득한 구시가지를 제대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발이 편한 운동화나 플랫슈즈. 입구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이 울퉁불퉁한 자갈로 되어있어 굽이 뾰족한 구두를 신고 걷기엔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구시가지 탐방의 진정한 묘미는 바로 느리게 걷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포르보 자체가 넓은 편이 아니라 구시가를 포함해 천천히 돌아봐도 반나절이면 전체를 다 둘러볼 수 있지만 곳곳에 숨은 매력적인 장소들로 어떤 곳에서보다 발걸음이 더뎌질 테다. 그래서일까. 이전까지 헬싱키에서 당일로 여행하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다 최근에는 일주일 여행지로 사랑받고 있는 것. 무엇을 보고, 즐길지는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포르보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포르보 성당Porvoo Cathedral. 처음 건축된
시기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지만 우리가 보는 성당은 1450년대에 완공된 모습이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 침략으로 파괴됐었고 비교적 최근인 2006년에는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소실된 비운의 건축물. 그러나 2년간에 복원 끝에 2008년 다시 문을 연 포르보 성당의 내부는 중세에 유행한 로코코 양식으로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구시가지는 첫인상만큼이나 독특한 곳이다. 세련된 옷차림을 갖춘 핀란드 사람들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요즘과는 동떨어진 소품에 시선을 두는. 현재 상점을 운영하는 주인 대부분은 이전 세대의 손자, 손녀들이라 운이 좋다면 그들보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을 손때 묻은 물건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박물관과 같은 앤틱샵은 메인 거리 양옆으로 길게 자리해 오래된 도시의 낭만을 더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으로 가득한 포르보의 구시가에서 핀란드의 중세에 대한 상상은 마치 그 시대를 함께한 사람처럼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졌다.

예술가들을 위한 지상낙원

핀란드의 많은 예술가가 포르보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마을이 너무나도 예뻐 시시각각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소문나 그들을 따라 이곳에 둥지를 틀기 때문이란다. 분명 포르보는 숨어있던 예술적 감성을 진화하게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전문 아티스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를 여행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그뿐인가. 구시가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집이나 문이 열려 있는 창고 안을 조심스레 들어가는 것으로 박물관에서 보는 것 이상의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전시라고 하기는 조금 민망할 정도로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름다운 도시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의 가치는 깨끗한 아트홀에 걸려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예술 작품이고 낭만적인 풍경이니 과연 핀란드의 모든 아티스트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살고 싶어 하는 도시임이 틀림 없다.

돌길과 중세를 빼닮은 풍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포르보 강 사이를 두고 펼쳐진 다른 세계로 향할 때다.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한 지 20년이 채 안 된 신시가지는 구시가와 전혀 달라 한눈에 구별이 가능하다. 가이드에게 여기도 포르보가 맞냐며 재차 확인한 뒤에야 인정할 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이었지만 아트팩토리Art Factory로 이어진 예술가들의 섬세한 작품 앞에서 의구심은 이내 사라졌다. 옛 공장을 개조해 만든 아트팩
토리는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문화, 예술의 미래를 더 멀리 내다보는 포르보의 새로운 명소로 모던한 건물 안에는 콘서트, 연극 공연, 전시회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유명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삶의 질을 향상하게 하는 모든 여가활동을 책임지는 곳인 셈. 예술가들에게는 이곳은 더욱 특별하다. 트랙터를 만드는 곳에서 꿈을 키워주는 작업실로 변모한 공간은 이곳으로 이주해 작품활동을 매진하는 아티스트에겐 제2의 집이니 말이다. 2년 전 핀란드 동부에서 포르보로 온 아티는 아트팩토리 덕분에 쾌적한 환경 하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공간 대여 외에도 매번 다른 테마로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아티스트들은 좋은 작품을 보고, 이곳에 전시되는 날을 꿈꾸며 작업에 더 열중하게 된다. 구시가지의 인상적인 풍경으로 지금은 중세도시로 불리는 포르보지만 언젠가는 ‘예술가들의 천국 포르보’로 널리 알려지지 않을까. 열정적인 아티스트와 그들을 돕는 아트팩토리가 덕에 아주 훗날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지만.

1 다리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전혀 다른 모습의 뉴타운이 펼쳐진다. 헬싱키로 오가는 배나 포르보 강가를 도는 배들은 대부분 이곳에 정박되어 있다. 
2 3 아트팩토리에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은 신인도 있지만 핀란드에서 유명한 인물도 많다. 개인 작업실 밖으로는 이렇게 빼곡히 자신의 전시를 홍보하는 인쇄물이 붙어있기도 하다. 
4 아티스트만 아트팩토리를 간다고 생각하지 말길. 딱딱한 전시회관이 아니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공간도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5 구시가지 내 낡은 집의 화장실을 개조해 만든 작은 전시공간이자 판매부스.

1 외양간에서 마주한 생명의 아름다움. 다리를 부들거리는 아기소를 보며 마음속으로 어서 일어나기를 열심히 응원했더랬다. 
2 잊을 수 없는 보스가드 농장의 풍경은 아마 이 사진 하나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3 입구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는 포르보의 명물인 샤롤레 고기를 맛볼 수 있다. 햄버거, 샌드위치 등 간단한 요깃거리와 냉동 포장된 고기를 판매한다. 
4 작은 크루즈 프레드리카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아 포르보 시내를 천천히 둘러보기에 좋다. 빨간 웨어하우스는 포르보 엽서와 브로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건물이다.

동화 속의 자연 농장, 보스가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예쁜 마을이 동화 속 배경으로 둔갑하게 하는 데는 언제나 초록의 자연이 함께했다. 중심가에서 굽이진 산길을 몇 번이고 거쳐 도착한 보스가드 농장Bosgard Organic Farm은 상상 속에서 그려왔던 풍경을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게 한다. 광활한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는 하얀 소들은 보스가드를 그저 목재와 고품질 소고기를 생산하는 농장이라 하기엔 아쉬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아마 이곳을 방문하는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주인에게 항의라도 했는지 초기에는 오직 식자재 생산만을 하는 농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현재는 원하면 언제든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도 운영하고 있다. 500년이라는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온 보스가드 농장에서는 농사, 삼림관리 방법을 배울 수 있고
야생 식물과 동물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호기심에 들어간 외양간에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기소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어미소를 두 눈으로 본 것. 아직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소가 힘겹게 첫 발을 내딛으려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어미소의 맑은 눈은 감동 그 이상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사했다.

길을 따라 피크닉을 즐기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휴식장소이기도 하지만 역시 보스가드 농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하얀 소 샤롤레Charolais다. 날이 좋으면 목초지를 자유롭게 거니는 소들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란 소는 더욱 건강하고 식용으로도 훌륭하다. 그래서 이 지역 고급 레스토랑의 소고기는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 많단다. 다시 포르보 중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맛이 궁금해 도저히 떠날 수 없다면 입구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보스가드 투어를 마무리하자.

크루즈와 함께 도시 한바퀴

하루 여행지로 오기 좋은 포르보이지만 발걸음을 급히 옮기지 않아도 된다면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한 것이 크루즈 투어다. 이미 어느 정도 둘러봤다 하더라도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은 없지만 그 만의 독특한 개성과 시간이 묻어난 미스 프레드리카ms. Fredrika에 탑승하면 누구보다 이 도시를 사랑하는 선장의 재미있는 설명이 시작된다. 천천히 배를 조종하며 포르
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배가 지나갈 때면 강가 주변 레스토랑의 손님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배를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집중된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민망함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로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한 시간 반의 크루즈 투어는 더욱 즐겁다. 물이 조금만 더 깨끗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는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지저분하지 것
을 알 수 있다. 바닥이 진흙이라 그렇게 보일 뿐, 아주 맑은 물에서만 볼 수 있는 물고기도 여러 종류가 살고 있다고 한다.

배는 신시가지에서 시작해 강을 따라 구시가지를 지나간다. 구시가지에서 잠시 눈길을 두고 지나갔던 붉은색 목조 건물이 배 위에서 보니 더욱 눈에 들어온다. 과거 포르보가 항구도시로 유명했을 때는 향신료나 각종 식료품을 보관하는 곳으로 활용된 포르보의 상징인 붉은 창고. 그러나 현재는 지반의 융기로 항구의 기능이 사라져 개인 공간이나 레스토랑,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강바람을 맞으며 배 뒷좌석에서 기분 좋은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선장이 더욱 큰 목소리로 모두 뱃머리로 와보라고 한다. 포르보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다리를 지나면 나올 것이라고. 조금 후 파인더 안으로 구시가의 파스텔톤의 건물과 신시가를 잇는 낡은 다리가 점점 확대됐다. 이후 배는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갔고 짧은 포르보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낭만적인 중세도시는 사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오래도록 남아 나를 또 다시 포르보로 향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