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 Culture life
Timeless Viennese Culture life

시간을 넘나드는 비엔나 예술 기행

시대를 막론하고 음악과 미술이 주는 감동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다. 비엔나의 예술은 이를 직접 두 눈과 귀로 경험하는 순간을 꿈꾸게 하고 언제든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탐방하고 골목길을 산책하며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의 진수를 경험했다.
글 김수현 기자 사진 진하정 기자 취재협조 비엔나관광청 www.vienna.info

여러 번을 가도 항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공간이 있다. 내겐 미술관과 박물관이 그렇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그림을 비슷한 환경에서 감상해도 언제나 작품이 주는 감동은 달랐다.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공연을 보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뿐인데도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특유의 분위기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고 느껴졌다. 이것이 주는 감동은 낯선 도시에서 배가 됐다.
귀에 익은 멜로디나 유명한 작가의 습작과 마주할 때면 코끝이 찡해짐과 동시에 내 안의 모든 감각이 바짝 서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비엔나에 사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매일같이 그것도 아주 자연스레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걸까.

꿈속에 그리던 예술가를 만나다

그건 아마도 전생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비엔니즈가 음악과 미술을 어려운 존재가 아닌, 이제 막 썸타기를 끝내고 연애 초기에 접어든 연인처럼 가까이에 두기 때문일 테다. 평범한 여행자인 나를 비엔나 예술의 세계로 처음 이끈 것은 에곤 실레도 구스타프 클림트도 아니었다. 그다지 흥행의 재미를 못 본 영화 한 편이었다.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비엔니즈 조차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식의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그럼에도 <뮤지엄 아워스Museum Hours>는 어딘가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거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을 때 내가 항상 1등으로 찾는 영화다. 100여 분의 러닝타임 동안 전체 내용의 3분의 2 이상이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을 무대로 삼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특별한 것이 없다. 캐나다에 사는 앤은 사촌 동생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비엔나로 향한다. 낯선 도시에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 것. 우연히 들어간 미술사 박물관에서 앤은 안내원으로 오랜 시간 일하고 있는 요한을 만난다. 요한은 앤을 위해 매일 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게 도와주고 직접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해주며 박물관 안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이 잔잔한 영화에 매료된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미술사 박물관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가슴 설레는 생각들도 이어졌다. 입구 한쪽 구석에 있는 클림트의 벽화를 오래도록 응시하는 상상,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의 대표작품들이 있는 전시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상상, 사방을 꽉 채운 무명 작품 사이에 앉아있는 상상. 영화 속 모든 장면은 미술관 안에서 금세 현실이 됐다. 물론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일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하루는커녕 일주일로도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회화 작품들과 고대 이집트 유물,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조각 및 공예품 등이 넓고 웅장한 건물을 가득 메운 곳. 만약 비엔나에 살게 된다면 나는 앤이 되기를 자처할 것이다. 몇몇 비엔니즈들이 그러하듯 34유로를 내고 1년 무제한 입장 티켓을 구입할 것은 물론이다.

미술사 박물관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은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 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으로 위로받았다. 궁전의 호수와 상궁을 보자마자 나온 탄성은 작은 통로를 지나 완벽하게 가꿔진 정원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졌다. 외관에 감탄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는 벨베데레 상궁에 있었으니. 이곳의 오는 여행자의 목적은 클림트 하나로 귀결된다. 상궁 안에는 클림트 작품 외에도 3층에 중세와 현대 미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지만, 역시나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 위해 걸음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암실처럼 꾸민 전시실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 크게 쿵쾅댄다. 고대하던 <키스The Kiss>를 마주한 감동은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전시실의 분위기상 지금 당장 눈물을 펑펑 흘려도 아무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박물관 내 공간 대부분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이 방 역시 마찬가지인데, 만일 촬영이 가능하다 했더라도 나는 셔터를 누르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잘 찍어보려 해도 이 반짝임을 그대로 담을 수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키스의 장면이 눈앞에 있는 느낌을 고스란히 기록할 수도 없을 테니까.

1 미술사 박물관 내부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화려한 벽화다. 건설 당시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주기 위해 젊은 예술가였던 클림트에게도 작은 부분을 허락했다. 클림트의 그림을 한번 찾아보시길. 
2 미술사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다. 작은 공원을 가운데에 두고 맞은편에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3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미술사 박물관 안에서 명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매우 정교한 작업이기기에 아직 한 작품만이 완성됐지만 점차 그 수를 늘려나갈 예정이다. 
4 벨베데르 궁전 상궁의 천장화. 미술사 박물관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여름철 여행 성수기 시즌이 오기 전 벗겨진 칠을 다시 하는 등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5 미술사 박물관이 잃어버렸던 귀중한 보물이 작년에 다시 돌아왔다. 훔쳐간 사람이 자수를 한 것이었는데 어디에 판 것이 아니라 땅속에 뭍어놨었다고 한다. 화려한 보석상자 같지만 소금을 담는 그릇의 용도였다고. 
6 미술사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브뢰헬의 <바벨탑>



1 4 에곤 실레는 비엔니즈가 사랑하는 화가다. 그는 짧은 일생동안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가감 없이 캔버스에 그렸다. 레오폴드 미술관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2 박물관지구의 전경. 입구로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3 비엔니즈가 부러웠던 것이 이렇게 미술관에서 수업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는 데 스스럼이 없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5 서머 오프닝이 열린 날. 저녁시간이 됐을 땐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6 레오폴드 미술관의 입구. 자연채광으로 에곤 실레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문화의 오아시스

현대미술을 논할 때 클림트와 함께 이야기할 예술가가 한 명 더 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스물여덟이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긴 생명력을 가지고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에곤 실레의 유명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으로 향해야 한다. 박물관의 원주인이자 미술애호가였던 루돌프 레오폴트Rudolf Leopold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곳으로 박물관 지구MuseumQuartier 안에서도 최고의 사랑을 받는 미술관이다. 인기의 비결은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그와 가까이 지냈던 클림트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상설전시 외에도 근현대 미술과 관련한 특별 전시회가 자주 열리기에 비엔니즈도 새 전시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수시로 방문한다.

레오폴트 미술관이 있는 박물관 지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예술과 문화 단지 중 하나이다. 복잡한 도시 안에서 조용히 예술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 18세기경 황실 마구간으로 사용된 넓은 공간은 이제 근대와 현대 예술의 교차점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에 지도와 현재 볼 수 있는 전시 및 공연을 표시한 안내판이 있다. 여행자의 발걸음은 대부분 레오폴트 미술관으로 향하지만 쿤스트할레Kunsthalle Wien와 현대미술관MUMOK에서 현대미술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테다. 박물관 지구 전체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의한 공간이다. 전시장을 제외한 넓은 건물의 상당수는 아티스트들의 작업실로 사용되고 있다. 야외에 자리한 독특한 모양의 의자는 비엔나 사람들의 실용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잘 드러낸다. 매년 초, 박물관 지구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한해의
의자 색을 투표할 수 있는데, 작년은 노란색이었으며 올해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씨 블루 컬러로 새 옷을 입었다.

박물관 지구 안에서는 전시회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운 좋게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서머 오프닝SommerOffnung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실내와 야외에서 공연, 가이드투어, 워크샵, 단편 영화 상영회 등이 펼쳐졌다. 엄청난 인파 속 비엔나 시내의 훈남훈녀는 다 모인 듯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곧 시작할 공연을 위해 옹기종이 모여 앉은 비엔니즈 옆에 나도 자리를 깔았다. 바에서 산 와인 음료 스프리처Spritzer 한잔을 시작으로 축제를 즐길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미술관 안에서 겪은 것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감지하며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희열을 느꼈다.

1 알베르티나에서 바라본 오페라 극장. 매일 저녁 오페라 하나를 상영한다. 입석 자리를 제외하곤 어느 정도 복장을 갖추는 것이 예의다. 
2 높은음자리표 모양을 한 작은 정원은 도시의 명물 중 하나이다. 
3 5 4구에는 어렵지않게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방도 있다. 
4 디자인 숍 사이를 걷는 세련된 비엔니즈. 
6 길을 걷다보니 이렇게 귀여운 서점도 만났다. 요리에 관한 책들이 있는 곳이었다. 
7 멋진 디자인에 아이디어가 더해지니 환경도 살리고 실용성도 만족시키는 아이템이 등장했다.

과거의 예술이 남기고 간 것

미술 이야기를 실컷 했지만 사실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 하이든, 슈트라우스, 베토벤이 거쳐 간 도시 안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지런한 이들은 오후부터 오페라극장 앞에서 줄을 서서 단돈 3유로를 내고 입석표를 산 뒤 세계 최고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실내가 아니라 비엔나 곳곳에서 열리는 야외공연 역시 높은 퀄리티로 관객을 전율하게 만든다. 무도회에 참석해 왈츠를 추는 것도 21세기를 사는 비엔니즈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친김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인 호프부르크Hofburg의 위용과 궁전 내 진귀한 보물까지 모두 감상하고 나면 이토록 값진 문화유산이 작은 도시에 몰려있다는 것에 또다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비엔나의 예술은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예술이 과거에서 멈췄다면 비엔나는 세계인들에게 역사적인 도시로만 기억됐을 거다. 매번 경건한 마음으로 명작들을 감상해온 아티스트들은 여기서 얻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완벽히 실체화했다. 4구의 슐라이프뮐
거리Shcleifmulgasse를 시작으로 케텐브뤼켄 거리Kettenbruckengasse, 시카네더 거리Schikanedergasse에 즐비한 샵의 디자인 소품, 옷, 그림이 그 결과물이다. 슐라이프뮐 거리에 위치한 업사이클링 디자인 샵Gabarage Upcycling Design은 버려진 물건을 전혀 다른 용도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제안한다. 낡은 방수천은 훌륭한 가방이, 볼링핀은 특색 있는 꽃병이 됐다. 혁신적인 생각, 환경보호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디자인 소품에 담아 비엔니즈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클래식 공연만큼이나 현대음악을 주제로 하는 공연 및 바도 많다. 비엔나 안에서는 누구나 재즈, 팝, 클럽 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수 있다. 예술은 관대하다. 그림을 볼 줄 몰라도 어떤 음악이 좋은지 몰라도 자유롭게 해석하며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비엔나를 여행하는 내내 한 번쯤은 그림과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가도 여행 중 봤던 예술 작품과 음악 한 소절이 문득 생각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이것이 예술의 도시 비엔나가 지닌 진정한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