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월간 뚜르드몽드
 
발행구분
[2018년 01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독일]     도시분류 : [아이제나흐]
기사제목
[OUTFIELD] Martin Luther 종교의 역사를 뒤집다, 마틴루터

Travel :: Germany

Martin Luther 종교의 역사를 뒤집다, 마틴루터

유럽을 흔든 3명의 인물이 마틴 루터(1483년-1546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808년-1873년), 칼 마르크스(1818년-1883년)라고 한다면
얼마나 내 말에 동의할 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틴 루터에 대해서는 분명 이의를 달 사람이 별로 없을 듯 하다는 점에는 자신한다.
거의 1500년간 유럽을 지배한 무소부재 전지전능의 로마교황청에 정면 도전해서 교회를 영원히 분열시켜 결국 개신교를 탄생 시킨 루터는
분명 제일 앞에 놓아도 될 듯 하다. 종교개혁의 주인공인 그의 장대한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권석하 편집위원(유럽문화탐사 저자)



1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고 몸을 피해 루터가 성경 번역을 한 바크부르그 성
2 아이제나흐 마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물들
3 바트 부르그성
4 루터의 마지막 침대 5 아이제나흐 마을 축제모습

2017년이 바로 그 마틴 루터가 독일 시골 마을 비텐베르크( Wittenburg ) 성당문에 1517년 10월31일 ‘95조의 반박문’ 대자보를 붙인 해로부터 500주년이 되는 해 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될 수 없다. 지금 전 세계 인구 75억 8천만 중에서 신구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24억 8천만이다. 이 중에서 천주교가 12억3천만, 개신교가 5억6천만이고 나머지 기타 소수 기독교 종파에 속한다. 결국 세계인구의 거의 1/3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그런 최대의 종교 역사에서 누구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친 루터의 발자취를 종교개혁 500주년을 핑계로 한번 찾아 가 보았다.

혹독한 라틴스쿨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다

우선 순례는 루터가 가장 사랑하는 마을이라는 아이제나흐( Eisenach )로 부터 시작해서 루터의 제일 큰 성취인 독일어 성경번역을 한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을 거쳐 출생해서 영세 받고 마지막 숨을 거둔 아이즐레벤 (Eisleben )에서 끝이 나는 일정이었다. 이 세 곳은 통독 전에는 동독지역이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제나흐(인구 42,000), 아이즐레벤(인구 24,000명)은 만일 루터와의 연관이 없다면 정말 관광객이 찾을 이유가 전혀 없는 조그만 시골 마을 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렌터카로 출발하면 200km의 거리이니 약 두 시간이 소요된다. 여행의 바람직한 순서로 보면 루터의 출생지인 아이즐레벤부터 들려야 말이 되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까운 아이제나흐부터 들리기로 했다. 아이제나흐에는 루터가 15살 때부터 3년 간 살았다는 집이 있다. 마을 관광 소개서에 의하면 투린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 되고 사랑스러운 반 목재집( Half timbered )이며, 루터가 ‘내가 가장 사랑한 마을( meingeliebtesdorf )’라고 부른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중요한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루터는 아이즐레벤에서 태어나 만스펠드에서 자랐으나 아이제나흐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 

소위 말해 철이 드는 나이인 15살
에서 3년을 아이제나흐이 집에서 살면서 동네 라틴 스쿨을 다녔다. 라틴스쿨은 한국으로 치면 외국어 고등학교 같은 특수학교이다. 14세기에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라틴스쿨은 고급 교육을 받는 학교였다. 주로 대학진학을 위한 준비학교로 라틴스쿨이 존재했다. 평민자녀들 중에 성직자가 되기 위한 준비로는 라틴 학교가 최고였다. 다른 교양과목과 함께 주로 라틴어 교육을 강조 하였다. 라틴어도 중세라틴어 문법에 중점을 두어 학업이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서 이 학교를 나온 유럽 위인들 중에는 학생 시절을 회상하면서 치를 떠는 경우가 많다. 교습 방법이 아주 혹독해서 미처 진도를 못 따라 오거나 숙제를 제대로 안 해 오면 선생이 자작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두드려 팼을 정도. 주로 바지를 벗기고 맨 엉덩이를 때렸고 심지어는 굶기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참고로 영국 명문 기숙사 사립학교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전통적인 체벌의 교육 방식으로 주로 회초리로 손바닥을 치는 식이었다. 1999년 영국 정부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사립학교 중 회초리로 학생을 처벌하는 학교에는 정부보조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를 해서 겨우 중단을 시켰다. 그러나 2008년 6,162명의 영국 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2%의 중고등과 16%의 초등학교 교사가 수업시간 중 특별한 경우에는 구타를 교육 방법의 하나로 도입에 찬성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아직도 영국 언론에는 교실에서 확실한 체벌 기준과 방법에 의한 체벌( corporal punishment ) 허용을 하자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아이제나흐에서 생의 전환기를 맞다

루터는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르푸르트( Erfurt )대학교의 법학 전공을 하도록 진학 준비를 여기서 했으니 루터의 일생에서 아이제나흐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루터는 동네의 가장 명문가인 코타와슈발베가의 안주인 눈에 들어 가문이 가진 지금의 ‘루터하우스( Luterhaus )’에서 기숙했다. (음악가 세비스찬 바하(1685년-1750년)도 바로 이 동네 출신이어서 생가와 박물관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때가 루터는 자신의 인성을 형성하던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루터는 세상의 어떤 도시도 아이제나흐보다 더 나를 아는 도시는 없다고 사랑했다. 그 아이제나흐를 루터는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의 하나인, 성서 번역을 나이 38살인 1521년 인근 바르트부르그성에서 하는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제나흐 루터하우스는 루터의 성경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거기다가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어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교육센터로서 존재 가치를 갖는듯 하다. 특히 1925년부터 시작된 신교에 관련된 물품(유화, 스케치, 에칭, 사진, 책, 편지, 원고, 배지, 동전, 메달) 수집품 1300여점을 보유하고 있어 독일 신교연구를 하고자 하는 학자들은 여기를 방 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까지 한다. 

하우스에는 루터가 번역해서 무명으로 출간된 ‘9월 성경’부터 그 이후 300주년 성경, 400주년 성경 등이 전시 되어 있다. 루터가 썼을 듯 한 지금의 기타의 전신이랄 수 있는 루트와 플루트가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루터는 음악가로서도 한 몫을 했다. 루터는 루트와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하고 자녀들과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선교를 위해 많은 성가작곡도 했다. ‘내 주는 우리의 강한 성(A Mighty Fortress Is Our God )’ 이라고 지금도 널리 불리는 성가가 바로 루터의 작곡이다. 루터는 여기 라틴 스쿨에서 이미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았다. 그리고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음악이론, 성악, 작곡 등 전반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한때는 음악을 직업으로 하기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루터는 길거리 술집에서 불리던 노래를 성경에 의거한 가사를 붙여 성당에서 노래하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신앙 물결의 선도자 역할을 신학이론만이
아니라 평신도들과 가까운 삶에서 찾기도 했다. 당시는 라틴어로 미사를 거행하던 시절인데 라틴어를 모르는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독일어로 성가를 부르게도 했다. 개신교가 성가를 이용해서 선교를 하는 일은 거의 루터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터는 라틴 성가를 독일로 번역하기도 하고 구약에 의거한 성가도 작곡하기도 했다. 1529년에 작곡한 ‘내 주는 우리의 강한 성 A Mighty Fortress Is Our God )’은 신교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가가 되었다. 루터의 37개 성가는 세계 신교 성가집에서 중요한 몫을 해내고 있고 특히 독일 신교 성가집에는 루터의 노래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루터를 존경해서 개명을 한 탓으로 이름을 바꾸고 루터의 철학까지 이어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내가 마틴 루터로부터 배운 건 하나의 운동은 오로지 노래로서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할 정도 였다. 결국 루터는 노래가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의 위력을 일찍이 파악하고 이용했다.

처음으로 그리스원전을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

루터의 종교개혁 말고 또 다른 큰 업적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일을 아이제나흐에서5km 떨어진 바르트부르그성에서 해냈다. 루터는 이 성에서 11주 만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 냈다. 루터가 처음으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은 아니다. 이전에도 이미 70여종의 독일어 성경이 존재했다. 그러나 모두들 라틴어를 원전으로 하는 성경이었다. 루터는 네덜란드 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1466-1536)의 그리스어 원전을 사용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첫 번째 사람이다. 라틴어 성경은 오류가 상당히 많은 성경이었다. 루터의 첫 성경은 1522년9월에 발간 되었다고 해서 ‘9월성경’이라고 불린다. 워낙 루터가 정성을 드리고 완벽을 기해 걸작으로 평가를 받았고 지금의 독일어 형성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어를 한 단계 높였다고 까지 한다. 물론 판매가도 1.5길더였으니 엄청 비쌌다. 당시 물가로 보면 살찐 황소 반 마리 값이었고 가정부 1년치 월급의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다. 1년 동안 2쇄를 해서 6,000부가 팔렸다. 당시 인구의 거의 대다수가 문맹 이었음을 감안하면 정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샀을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 뿐만 아니라 스테디 베스트셀러로 향후 12년 동안 69쇄가 인쇄되어 거의 2십만 부가 팔렸으니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수천만 부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루터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신성로마제국회의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마저 박탈 당했기에 당시 법으로는 누가 루터를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제나흐 마을 뒷산 정상에 위치한 바르트부르그성에 숨어서 수염도 기르고 이름도 바꾼 채 기사복장을 하고 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바르트부르그 성에는 루터가 칩거하면서 성경번역을 했던 방이 잘 보존 되어 있다. 아주 간소한 장식의 방에는 책상이 하나 있는데 루터가 쓰던 책상은 아니다. 원래 루터가 쓰던 책상은 추종자들이 세월에 걸쳐 조각조각 떼어 가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루터가 직접 쓰던 물건은 마루에 놓인 흰색 고래 척추덩어리이다. 루터가 발 받침으로 썼다고 하니 그 받침 위에 발을 올리고 번역에 몰두하던 루터가 떠 오른다. 500년 이상 된 성 치고는 보존이 잘되어 있어서 눈요기로는 훌륭한 성이었으나 루터와 직접 관련된 유물들은 이발 받침 말고는 별로 없다. 루터가 번역을 할 때 악귀들이 방해를 해서 잉크병을 던져 내 쫓는 바람에 벽에 잉크자국이 있다고 하는데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이 방에서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세상을 맞서 싸운 거인의 모습을 상상해 본 일 만으로도 바르트부르그 성은 올 만하다.


1 아이제나흐 마을 모습
2 루터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
3 루터가 죽을 때까지 같이 지냈던 절친 유스투스 요나스 전신 초상화
4 기념 메모들 한글들이 많이 보여 한국 개신교들의 열성을 말해 주는 듯 하다
5 루터 얼굴이 들어 간 기념품


성직자들의 전유물인 성경을 일반에 전파하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대자보를 붙인 뒤 걷잡을 수 없이 전 유럽을 태우는 들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사실 최근에 밝혀지는 사실로는 루터는 성당 문에 대자보를 붙였다고 직접 말했거나 기록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나중에 현장에 없던 측근이 그렇게 기록을 했고 당시에 하급사제였던 루터가 주교에게 먼저 보내지 않고 정면 도전 하듯이 그런 불온문서를 내놓고 성당 출입문에 붙일 수 없다는 점을 연구가들이 지적한다). 감히 누구도 도전하지 않던 교황에 대한 루터의 정면 도전은 광야에 던진 불길이었다. 루터의 대자보는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 활판 인쇄술에 의해 대량으로 인쇄되어 2주만에 전 유럽으로 퍼졌다. 마침 불어 오는 광풍에 들불은 맹렬하게 번지기도 했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의도하지 않은 기름 역할을 했다. 그런데 재미 있는 일은 종교개혁의 시발점의 앞뒤에 구텐베르크가 본인은 의도하지 않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구텐베르크는 성경인쇄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큰 돈은 면죄부를 인쇄해 성당에 납품해서 벌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없었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고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구텐베르크가 병도 주고 약도 준 셈이니 재미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루터가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일반신자 가정으로 퍼져 나가게 된데도 바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 전에는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거나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독일어 성경이었고 그마저도 필사본이라 엄청나게 비싸 개인이 소장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는 루터도대학교에 입학 할 때까지 성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읽은 적은 물론 없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성경을 보았을 정도이다. 루터 집은 구리 탄광과 마을에 집도 몇 채 가진 상당한 부자였고 아버지는 신앙심도 독실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모든 신앙에 관계 되는 일은 이렇게 교회와 사제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고 거기다가 하느님과 소통하는데 교회나 사제가 필요없다는 루터의 주장이 인쇄물을 통해 번지면서 드디어 유럽에는 정말 개혁이
아니라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세의 마지막 인물이자 현대의 첫 인물

거기다가 루터가 파문을 당한 뒤 바르트부르그 성에서 숨어서 성경 번역을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 온 뒤 수도원에서 전직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서 살면서 식탁에서 손님들과 벌인 유명한 ‘식탁담화( Tischreden )’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도 크다. 식탁담화가 루터의 철학과 사상을 유럽에 널리 퍼뜨려 종교개혁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도 사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의 책은 인쇄비도 비쌌지만 제본비도 고액이어서 일반 가정집은 책 한권 갖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루터는 자신의 글이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걸 알고는 저술을 해서 인쇄업자에게 대가 없이 주었고 인쇄업자는 이를 바로 프린트 해 판매를 했다. 대개 한 두 장 최대한도 16페이지를 넘지 않았고 제본 하지 않고 팜플렛 형태로 염가로 판매했다. 인쇄 업자는 인쇄 하는 데로 팔리니 루터의 저술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당시는 판권
이 없던 시절이니 인쇄업자 누구 하나가 인쇄를 해서 내 놓아 인기가 있으면 바로 옆 인쇄소에서 그대로 인쇄를 판매 하니 전파속도가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제자들이 루터의 대담을 따라 적어서 내 놓는 유명한 루터의 ‘식탁의 담화’를 일반인들은 연속방송극 기다리듯이 기다렸다. 자신들이 이해하는 독일어로 평이하게 하는 대화체이고 지금까지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교황청과 교회의 이론과 비리나 모순을 까부수는 시원한 내용의 팜플렛이니 사람들은 기다렸다가 사서 읽었고 돌려 가면서 읽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체제 비판의 불온문서나 금서는 원래 인기가 더 있는 법. 루터는 신기술인 인쇄물의 이점을 최대한도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도로 퍼뜨렸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은 재빠르게 유럽을 물들이고 말았다. 결국 루터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이후 단 5년만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성서이론가가 되어 교황청도 함부로 못하는 거물이 되었다. 정보가 권력자나 가진 자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퍼지기 시작하고 교회와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신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시민들이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가 힘을 잃고 당시 이미 맹위를 떨치던 인본주의라고 일컬은 르네상스와 합쳐지면서 유럽에서 로마교황청이 본격적으로 권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중세( medieval age )에서 현대( modern age )로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루터를 사람들은 중세의 마지막 인물이자 현대의 첫 인물이라고 말한다. 결국 루터에 의해서 유럽인들이 교회의 종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1 바트부르그성
2 루터의 서재
3 성화
4 루터 모습
5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기 전의 독일어 성경 1483년


종교개혁의 서막

이미 말했듯이 구텐베르크가 의도했던 안 했던 신교의 시작에는 구텐베르크가 면죄부 판매부터 루터의 대자보 보급까지 시작과 끝에 다 개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의 아버지이지만 인쇄로는 돈을 벌지는 못하고 파산해서 결국 인쇄소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독일 내에 대대적인 인쇄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새로운 주장이 담긴 인쇄물에 목말라 했다. 덕분에 조그만 동네 비텐베르크는 바로 독일 인쇄의 중심 중의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500년경에는 독일 전국에 300곳의 인쇄소가 생겼다. 이전에는 1권의 성경을 필사 하는데 대략 2개월이 걸렸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500권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뭔가를 제대로 이루어 내려면 돈과 연관이 되는 일을 해서 장사꾼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장사꾼이 돈이 되게 해주면 그들이 알아서 내 이론을 퍼뜨려 준다는 뜻이다. 만일 인쇄술이 없었다거나 루터가 돈을 받고 자신의 저술이나 식탁 토론 내용을 한 인쇄업자에게만 주었다 거나 판권이 당시 있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루터의 주장이 전 유럽에 퍼져 자신을 죽이려 했던 교황청을 단 5년만에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현대 정치인들이 배울 필요도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루터만큼 재빠르게 신기술을 이용해 정권을 잡은 인물도 있긴 있다. 거의 무명의 부동산재벌에 불과하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전의 히트 TV 인기 프로그램 ‘The Apprentice’ 에서 ‘You are fired!’ 를 잘 쓰면서 유명인사가 되 고 인터넷과 SNS를 이용해 평균수준의 유권자와 직접 소통을 하면서 대권을 잡은 일을 보면 5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되풀이 되는 기시감이 든다. 새롭게 떠오르는 기술을 잽싸게 이용해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일은 500년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지면관계상 루터가 태어나고 영세를 받고 죽었던 아이즐레벤에서의 파란만장한 나머지 이야기를 2월호에 게재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리스트

메인페이지 | 회사소개 | 정기구독 | 뚜르드몽드 기사검색 | 커뮤니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