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모라비아 Moravia  

새로운 연인을 꿈꾸다 

 

2천 년대 초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의 히트와 함께 프라하는 달콤한 로맨스를 꿈꾸는 대한민국 배낭족들의 최애 여행지로 급부상했었다. 나에게도 역시 프라하는 발을 딛는 첫 순간부터 ‘유럽의 감성’으로 각인됐고, 지금껏 체코는 첫 입맞춤과 같은 풋풋한 기억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운 여행지로 성장한 모습의 프라하를 뒤로하고, 처음 만난 다른 체코에서 잊고 있던 옛 프라하의 감성이 툭하고 튀어 나왔다. ‘모라비아’, 내 사랑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진 땅. 

에디팅 편집부 글과 사진 김관수 트래블 인플루언서  취재협조 체코관광청  

모라비아는?

체코는 수도 프라하를 포함하는 서부의 보헤미아(Bohemia), 동북부 지역의 실레지아(Silesia),  그리고 제2의 도시 브르노(Brno) 등이 속해 있는 동남부 지역의 모라비아까지 모두 3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체코어로 ‘MORAVA(모라바)'라고 부르고, 모라비아 강이 이 지역을 지나가고 있어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모라비아 지역은 과거 영화롭던 시절을 보여주는 바로크 양식의 수많은 유산들과 체코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들이 특유의 클래식한 정취를 선사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 체코에서 가장 힙한 분위기와 독특한 도시재생의 매력도 함께 갖추고 있어 모라비아는 최근 체코를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레드니체 성 Castle Lednice 

‘유럽의 정원’에서 디톡스를

모라비아 남부에 있는 ‘레드니체 성’으로 향하는 길은 특별히 기대가 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럽의 정원’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네오고딕 양식의 성과 정원’이라는 설명은 그 화려한 수식어 위에 얹어진 부록 같은 느낌이었다. 귀족들의 여름 회의장이자 별장이라는 소개가 마치 나의 별장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 환청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레드니체 성은 의외로 소탈하고 아늑했다. 성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귀족의 별장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모습이다. 내부를 관람하는 투어프로그램을 통해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휴가를 즐기던 공간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조금은 긴장됐던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었던 곳은 기타 연주를 감상했던 작은 홀. 커튼 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햇살에 물든 마루, 그 위의 양탄자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눈감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레드니체의 먼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난 어느새 햇살을 타고 창밖으로 날아갔고, 정원을 거니는 귀족들을 바라봤다. 언젠가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었다.

 

정원의 끝은 아득히 멀어 보였다. 가장 먼 곳 한가운데에 뜻밖의 미나렛 첨탑이 부끄러운 듯 모습을 드러냈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식 없이, 그대로의 자연만이 존재하는 길이지만 싱그러운 초록들의 조화로 정원은 풍요로웠다. 호수, 새, 꽃, 나무, 잔디, 나무다리, 아이, 가족들까지.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을 통해 흘러들어온 레드니체 정원에 사는 모든 것들의 기운이 몸속으로 전해져왔다. 조금 더 산뜻하게, 조금 더 사색하며, 자연이 만들어놓은 초록빛의 터널을 걸을 수 있었던 시간. 나의 머리와 가슴은 몰라보게 가벼워져있었다.

     

Info. 레드니체-발티체

레드니체 지역은 인근의 발티체 지역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인공 경관으로, 이 지역의 정원은 약 600년 동안 리히텐슈타인 가문에 의해 정성스레 가꾸어져 왔다. 로맨틱한 분위기가 드넓게 펼쳐진 정원들 사이로 레드니체 성과 발티체 성 등이 아름다움을 더하며, 두 성 사이를 자전거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다. 문의 www.zamek-lednice.info/en

 

미쿨로프 Mikulov

유쾌한 와인마을

레드니체를 떠나 미쿨로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언덕 위에 자그마한 건물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에 걸린 듯 눈을 뗄 수 없는 새하얀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언덕 아래에 이르렀다. ‘거룩한 산’을 뜻하는 하얀 예배당 ‘스바티 코페첵(Svatý Kopeček’)은 모라비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성지순례지로 꼽힌다. 그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의 마지막 여정을 기념하는 동상 15개가 설치되어 있어 ‘십자가의 길’로 불리는 거룩한 성지다. 마음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었지만, 발길은 체코를 대표하는 정통 와인이 기다리는 미쿨로프에 닿아 있었다. 광활한 농장 같은 와이너리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차량이 멈춰 선 곳은 아담한 마을. ‘와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걱정 반, 의심 반이었다. 옛 돌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낡은 골목을 따라 산길을 올랐다. ‘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건가?’ 싶더니,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돌산 아래에 동굴처럼 자리 잡고 있는 한 와이너리로 들어가 ‘체코 와인의 진리’라고 불리는 화이트와인과 음식을 주문했다. 양배추를 주재료로 만든 빨간 국물의 스프 젤녜츠카(Zeľňačka)는 김치찌개와 거의 흡사한 맛을 보여주었고, 뜻밖에도 화이트와인과 절묘한 궁합을 선사했다. ‘미쿨로프의 화이트와인만 가져간다면 한국에서도 멋진 페어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식사를 마친 뒤, 백발의 주인장은 한편에 굳게 닫혀 있던 동굴 문을 열었다. 거대한 암벽들이 그대로 식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풍경을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짜 동굴이 그 속에 숨어 있었다. 바로 와인셀러다. 주인장은 와인을 하나씩 꺼내어 따라주면서 미쿨로프 와인에 대해 거창한 소개를 이어갔다. “미쿨로프에서는 와인을 친구와 함께 페이스를 맞춰가며 함께 마셔야 합니다. 본인 잔에 직접 따라 먹는 사람을 이 지역에서는 알콜중독자라고 하죠.(웃음) 건배는 처음에 한 번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건배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먹습니다. 모라비아 지역의 여자들은 화이트와인만 먹어야 합니다. 모라비아 여자들은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에요.”라며 껄껄 웃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미쿨로프, 그리고 미쿨로프 산 화이트와인이었다.

 

브르노 Brno

상상력 가득한 체코 최고의 힙플레이스

우리의 부산 같은, 체코의 두 번째 도시 브르노를 찾았다. 13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는 양배추시장(Cabbage Market)이 브르노 여행의 첫 목적지. 시내 중심의 가장 큰 광장에 장이 서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시장. 무려 800년에 달하는 세월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오래도록 브르노 시민들이 소식을 전하고 인사를 나누는 만남의 장이었음을 추측하게 했다. 그럼에도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아담한 시장은 더욱 정감 넘치게 다가왔다. 화사한 파라솔 아래 상인들이 펼쳐놓은 물건들은 더욱 화사하다. 검고 붉은색의 베리 종류를 비롯해 신선한 과일과 채소, 식료품, 꽃 등이 이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의 대부분이다. 상인들이 직접 생산해서 이른 아침부터 들고 나와 물건을 모두 팔 때까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광장의 파르나스 분수대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 등은 오래도록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브르노의 길목길목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구 시청사(Old town hall)에는 ‘브르노 드래곤(Brno Dragon)'과 ’브르노 휠(Bruno Wheel)', 그리고 약속한 돈을 받지 못해 화가 난 조각가가 일부러 구부려서 만든 조각품이 있고, 늘 그곳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 있다. 브르노의 상징이기도 한 브르노 드래곤은 거의 완벽하게 악어 모양을 하고 있다. 과거 악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브루노 시민들이 전설 속의 용이라고 부르면서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웃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또 다른 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2010년 만들어진 프리덤 광장(Namesti svobody)의 천문 시계는 그 모양부터 이색적이다. 마치 커다란 총알처럼 생긴 약 6미터 높이의 이 시계는 30년 전쟁 기간에 스웨덴 군대에 대항한 도시의 위대함을 형상화한 기념물이다. 또한 이 시계는 특이하게도 오전 11시에만 딱 한 번 시간을 알려준다. 유리구슬을 네 개의 구멍 중 하나로 내보내는데, 그 구슬은 줍는 사람이 임자다. 때문에 늘 11시가 가까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대기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문제가 있다면 11시 이외에는 이 시계를 통해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 그래서 길 건너에 평범한 시계 하나를 설치해놓았다. 11시가 훌쩍 지난 오후의 천문 시계 앞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천문 시계 옆에는 노천카페 ‘Na Brno dobrý’가 있다. 마치 빛 좋은 해변이라도 되는 듯, 상의까지 벗고 비치의자에 누워 태양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색 카페다. 체코어로 도브리(dobrý)가 ‘좋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비록 바다가 없는 체코이지만 이 카페가 있으니 브르노에서도 해변을 즐길 수 있어 좋다’는 의미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브르노 사람들은 한결 같다. 사고의 자유로움과 유쾌함, 익살까지 더해진 브르노 사람들을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브르노에는 전설적인 빌라 투켄하트, 신비로운 언더그라운드, 선택된 소수자를 위한 원자폭탄 대비소,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납골당, 악명 높은 감옥 등 유럽에서는 꽤 유명한 독특한 볼거리들이 많다. 최근에는 도시에 활기를 가득 불어 넣고 있는 젊은 감각과 문화적 감성이 이들 볼거리보다 더 많은 여행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체코 최고의 교육 도시이자 특이하고 흥미로운 어트랙션을 경험할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유럽에서도 삶의 질이 높은 도시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저녁 무렵, 브르노에서 가장 핫하다는 레스토랑에서 시작된 ‘브르노 힙플레이스 투어’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총 6곳의 레스토랑과 바 등을 돌아보고 각각의 시그니처 음료와 음식을 맛본 뒤에야 마무리 된 투어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조금도 취하지 않는, 다만 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창조해 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유니크한 신세계를 던져주었다. 세계 최대 맥주 소비국의 명성에 걸맞은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체코 맥주, 그리고 모라비아의 자랑이자 모라비아 여행의 머스트 아이템인 와인을 두고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고민을 놓게 해준 건, 브르노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스페셜한 칵테일과 재기발랄한 게임과 함께 탄생한 칵테일, 그리고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기발함과 훈훈함이 돋보인 한 권의 매거진 같은 메뉴판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브르노 시내의 다양한 바들을 사람의 성향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구분지어 놓고, 개인 취향에 따라 원하는 방향의 바를 선택하면 그 바에서 판매 중인 칵테일을 또 다시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즐길 수 있는 시스템. 그 시간은 단순한 투어가 아닌 선진 문화에 대한 학습의 시간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그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즐기고 돌아오던 늦은 밤 한, 양배추 시장 입구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어린 모차르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Info.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

브르노는 체코와 주변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면서 수세기동안 북쪽과 남쪽의 유럽 문명을 연결했던 고대 무역 루트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과거 올로모츠가 모라비아 최고의 도시였지만, 1618년~1648년 사이의 30년 전쟁에서 올로모츠가 스웨덴에 의해 점령당하며 브르노로 모라비아의 권력이 넘어왔고, 현재도 모라비아의 주도로 남아있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과 역사적 사건들은 브르노를 체코의 두 번째 도시이자 체코에서 가장 힙한 도시, 체코와 주변국들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들러 가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게 했다.

<더 자세한 내용-2020년 7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