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만든 작품 하나, 세인트 마틴

작은 땅, 아니 작은 섬에 네덜란드와 프랑스, 두 개의 정부가 들어 서 있는 세인트 마틴(Sint Maarten/Saint Martin)은 그 특유의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잘 보존하고 있어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기항지다. 친절한 사람들 아름다운 해변과 생기 넘치는 시장을 돌아보며 보낸 세인트 마틴에서의 긴 하루를 소개한다.

 

글과 사진 전준호 기자

 

오전 5시. 크루즈십은 예정시간 아침 7시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새벽빛 덕에, 아직 세상이 어두운데도 세인트 마틴의 실루엣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지난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랬는지 유난히 배가 심하게 흔들려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아니, 어쩌면 배가 흔들려서라기보다 가고 싶었던 곳이 가까워진다는 마음에 흥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세인트 마틴(Sint Maarten/ Saint Martin)은 카리브해 크루즈의 몇 기항지 중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곳이다. 섬은 하나인데 북쪽의 프랑스령과 남쪽의 네덜란드령으로 갈려있으니, 그만큼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섬이라는 고립된 지형적 특성에 두 나라의 문화가 들어와 다시 이곳 상황에 알맞게 약간의 변형을 거쳐 정착했을 것이고, 따라서 세계 어떤 곳에 가도 만날 수 없는 ‘세인트 마틴 고유문화’가 형성되었을 거라는 사실쯤, 누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또한 스마트한!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세인트 마틴 섬에 내렸다. 기자가 사전에 수집한 정보 없이 취재를 감행하다니, 군인으로 치자면 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갑옷 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어쩌랴. 아직 한국인이 많이 찾는 여행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 세상에서 몇날며칠을 허우적댔어도 마음에 드는 정보를 건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탓에 세인트 마틴에 발을 내딛으며 머릿속을 온통 지배한 생각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를 손에든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필요한 기초지식이나 기법을 전혀 모르는데 손에 쥐고 있는 백지를 그림으로 채워야 하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으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헤아릴 길 없는 세인트 마틴은 소문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날씨는 또 어찌나 끝내주던지. 햇빛이 쨍하다는 표현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아마도 이런 데에서만 써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흔하게 쓰이는 화창하다, 맑다, 눈부시다, 라는 표현들도 모두 마찬가지. 꼭 필요한 만큼의 구름이 점점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기까지 하다. 그 눈부심이 적응되어 반 쯤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배에서 쏟아져 내린 사람들이 각자 갈 길을 정하느라 나름대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그 사람들 틈을 헤집고 택시정류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관광객들에게 행선지를 묻고 택시에 태워주는 사람을 통해, 택시를 몰며 지역 가이드까지 해줄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역시 소문난 관광지답게 관광객이 필요로 할 만한 준비는 모두 갖추고 있는 스마트한 곳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세 개의 깃발이 세인트 마틴 섬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제일 왼쪽에 있는 것은 세인트 마틴의 깃발이고 가운데가 네덜란드, 오른쪽에 있느 것이 프랑스 국기이다

 

하나의 섬, 두 개의 정부

이제는 크루즈쉽이 드나드는 일이 일상적인 세인트 마틴 섬에서도, 배가 정박하는 곳은 네덜란드령의 수도인 필립스버그(Phillipsburg) 내에 있는 그레이트 만(Great Bay)이다. 따라서 배에서 내린 관광객은 필립스버그를 중심으로 하는 네덜란드령 땅부터 둘러보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아마도 세인트 마틴이 프랑스령과 네덜란드령으로 갈리게 된 전설일 것이다. 먼 옛날, 주인 없는 이 섬에 프랑스 사람과 네덜란드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서로 한 곳에서 출발하여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다 다시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땅을 가르기로 했다. 다시 말해 부지런히 걸어갈수록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게임이었고, 그 결과가 지금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이 조금 더 부지런하게 걸었는지 아니면 네덜란드 사람이‘ 토끼와 거북이’에 등장하는 토끼처럼 중간에 잠깐 낮잠을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로 현재 프랑스령 땅이 네덜란드령보다 조금 더 크다. 물론 이 섬은 1493년에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17세기에 유럽 열강이 약소국을 두고 벌인 식민전쟁의 결과 1648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협정을 맺어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엄연한 역사가 존재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이곳에도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적인 배경을 배제한 이야기가 유래되고 있는 것이다.

작은 섬 속 작은 네덜란드, 필립스버그

가이드가 우리를 처음 안내한 곳은 네덜란드령의 수도 필립스버그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인 콜 베이 힐(Cole Bay Hill)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높은 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마치 지도의 일부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콜 베이 힐에서 내려와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한 곳은 세인트 마틴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해변이다.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당에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는 던 비치(Dawn Beach)와 마호 베이 비치(Maho Bay Beach), 번화가인 프론트 스트리트(Front St.)와 바로 연결되는 그레이트 베이 비치(Great Bay Beach)를 거쳐 누드비치인 쿠프코이 비치(Cupecoy Beach)까지. 특히 누드비치인 쿠프코이 비치의 간판 역할을 하는 남녀 한 쌍의 나무 조각상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명물이다.

 

파란 하늘과 투명한 바다, 새하얀 백사장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모습. 이것이 진정 캐리비안 섬에서 볼 수 있는 해변의 모습이다

 

면세지역인 이 섬에서 쇼핑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관광객 사이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라면 배가 정박한 그레이트 만 지역으로, 이곳에 들어선 예쁜 숍과 고급 부티크는 쇼핑하는 이방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처럼 그레이트 만이 쇼핑가로 유명하다면 마호(Maho) 지역은 레스토랑과 술집, 클럽이 모여 있는 번화가로, 활기와 젊음이 넘치는 트랜디한 거리다. 한편 그레이트 베이 비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암스테르담 요새(Fort Amsterdam) 역시 이곳을 떠나기 전에 들러봐야 할 곳이다. 1631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요새는 1633년에 스페인에게 빼앗겼다가 15년만인 1648년에 네덜란드가 다시 탈환한 것이라고.

 

햇빛이 쨍하다는 표현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꼭 필요한 만큼의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이런 날에만 써야 할 것이다

 

남 프랑스를 닮아 더욱 따스한 땅 마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에 입을 쩍쩍 벌리며 감탄하고 있자니 어느새 마리고로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 있는 땅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신분증을 검사하거나 하는 귀찮은 철차가 이곳에는 없다. 그저‘여기서부터는 프랑스 땅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네덜란드 땅입니다’, 하는 식의 이정표가 나름의 국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령의 수도는 마리고(Marigot)다. 풍부한 햇살을 받아 비옥한 남 프랑스와 그 모습이 많이 닮은 이곳에는 아기자기한 숍들을 비롯해 프랑스 특유의 분위기를 내는 레스토랑들이 가득하고, 무엇보다도 구경하는 재미가 넘치는 마리고 시장(Marigot Market Place)이 있다. 변변한 상점 하나 없이 거리에 자리를 잡고 점포를 낸 상인들은 구경 나온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느라 분주하고, 관광객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값을 흥정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한편 ‘캐리비안 레스토랑의 중심지(Restaurant Capital of the Caribbean)’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랑 카세(Grand Case)는 그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세계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 카리브해의 싱싱한 해산물을 비롯해 프랑스, 크리올,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요리까지, 실로 다양한 미각의 향연이 열리는 곳이다. 물론 프랑스령의 땅에도 유명한 해변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곳은 레드 베이(Red Bay)와 롱 베이(Long Bay), 플럼 베이(Plum Bay) 등으로, 캐리비안 특유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따뜻하고 풍요로운 남 프랑스의 분위기가 느껴져 더욱 매력적이다.

 

한없이 서글프기도, 더없이 행복하기도 한 사람들의 섬

택시 가이드와 함께 한 여정은 필립스버그로 되돌아오면서 마무리 되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시계를 보니 배가 떠날 시각까지는 아직 꽤 여유가 있었다. 이왕이면 주어진 시간을 모두 채워야 겠다 싶어 쇼핑가를 배회하고,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고, 또 시원한 스프라이트 한 모금에 뙤약볕 아래의 더위를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신나게 즐기고 배로 돌아가는 길,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동정심 같은 것이 생겼다. 저 멀리 보이는 몇 척의 크루즈쉽은 하루 여정에 지친 관광객에게는 쉼터지만 이곳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손님’들이 드나드는 이동수단일 뿐이다.

 

아름다운 카리브에서 살고 있으니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은, 어쩌면 반대로 커다란 배를 타고 유람을 즐기는 사람들을 더없이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새삼 그들의 삶이 서글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질 무렵이 되자 눈부시게 청명했던 대낮의 하늘과는 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세인트 마틴의 노을 진 하늘을 뒤로 하고 떠나오면서는, 그래도 역시 그곳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거라고 결론을 냈다. 그럴 것이다. 남들이 한 번 보고 평생 잊지 못할 풍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