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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5월호] 대륙분류 : [아시아] 국가분류 : [말레이시아] 도시분류 : [코타키나발루]
기사제목
[ESSAY] 평화의 땅, 코타키나발루
|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북동부에 위치한 사바 주의 주도(主都) 코타키나발루는 예부터 ‘태풍 아래의 땅’으로 불려왔다. 태풍의 발원지부터 멀찍이 떨어진, 영혼들도 잠드는 평화로운 땅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코타키나발루는 망자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사랑을 잃고 상처를 입은 영혼들에게는 쓰라린 소독약을, 일상에 찌든 이들에게는 천상의 휴식을,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기대 그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땅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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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타, 영혼의 안식처 |
공항에 처음 발을 내딛고 동남아 특유의 고온 다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던 순간, 일상에 숨겨뒀던 기억들이 딱딱한 껍질을 뚫고 꿈틀거린다. 이곳의 기운 속에 있는 어떤 성분이 이토록 먹먹한 기분을 종용하는 것일까. 쓰라린 상처에 빨간 소독약을 바르고 얼른 따가움이 가라 앉기만을 기다리는 심정이다. 해가 떨어지고도 이곳의 공기는 여전히 열대의 기운을 푹푹 내뿜는다.
뭔지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싶은 오후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있다. Welcome to Sabah! 이빨을 드러내고 씩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가이드, 존의 첫인상이 순박하다. 이윽고 그가 이곳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존 말코비치’ 중에 하나임을 발견한다. 공항에서 스치는 현지인들은 백이면 백, 존의 얼굴처럼 느긋함과 평온함을 가지고 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인구 35만의 제법 규모 있는 도시건만, 동남아 관광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흔이나 난잡함과는 거리가 멀어 새삼 느긋한 기분이 든다.
밤이 깊었지만 비교적 치안이 안전하다는 소리를 들은 터라 파장을 맞은 야시장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동네 한 바퀴 돌듯 둘러본다. 간혹 솜털 보송한 동네청년 서넛이 모여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뿐 조용하기 그지없다. 도둑고양이들 역시 생선을 찾아 어슬렁대거나 하품을 하고 바닥에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다. 사바주 관광청은 이웃한 관광지인 발리를 따라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요즘도 불륜단속을 위해 호텔을 급습하는 종교경찰이 있을 만큼 이슬람 교리가 엄격히 살아있는 이곳에 발리나 푸껫 식의 ‘짜릿한 나이트라이프’는 말 그대로 먼 나라 이웃나라 얘기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코타키나발루에는 풍요로운 원시림을 간직한 키나발루 국립공원과 매력적인 열대 섬들로 이루어진 퉁구 압둘라만 국립공원, 유황온천 등등 곳곳에 신의 손길과 축복이 드리워져 있다. 이들이 그 차이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문득, 이곳이 무척이나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
|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법 |
아침에 일어나니 창 밖으로 거짓말 같은 남중국해가 펼쳐져 있었다. 어제의 고요한 어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온통 적막한 어둠뿐이어서 호텔이 바로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 수평선의 경계가 가물가물하다. 그 중간쯤에 다이빙 포인트로 유명한 산호섬인 사피섬이 자리해 있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하루 반나절을 이곳에서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그들이 머무는 특급 리조트에서 골프를 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 활동적인 체질이 아닌 탓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미국인 가족도 동남아시아 최고봉인 키나발루산(4,095미터)을 등정할 계획이라며 연신 등산계획을 떠들어 댔는데, 그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건 키나발루산에서만 서식한다는 긴 코 원숭이와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라플레시아, 그리고 이 모든 걸 구경할 기대에 부푼 일곱 살 마이클의 얼굴이다. 볼터치를 한 듯한 볼이 인상적이었던 꼬마 마이클은 지금쯤 키나발루산의 긴 코 원숭이를 보고 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겠지. 부디 그 원숭이와 종(種)을 초월한 우정을 나눌 수 있길. 엉덩이에 힘을 주고 서둘러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일주일에 두 번만 운행하는 북보르네오 증기 기차를 타기 위해서다. 늦으면 국물도 없다. 이 열차는 탑승인원이 180명으로 한정돼 있는데다가 예약자로 항상 만석이기 때문이다. 1900년대로 거슬러 달리는 기차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냥 마음이 부푼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나 보던 증기기차가 바로 눈앞에 있다. 열차 내부는 영화 ‘오리엔털 특급열차’의 한 장면처럼 고풍스럽기 그지없고, 승무원들은 대영제국 시절의 제복을 입고 음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북보르네오 증기열차는 매주 화, 토요일 오전 10시에 코타키나발루역을 출발해 키나루트 티엔시사원과 파파르 시장에 정차한 후 다시 귀환길에 올라 오후 1시 45분에 코타키나발루역에 도착한다. 중간 정착지에서 잠시 내려 관광과 쇼핑을 할 수 있고 기차에서 제공되는 점심도시락도 소풍분위기 내기에 그만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세상만사가 다 여유로워진다.
기찻길 옆 남루한 오두막에서 손을 흔들며 관광객들에게 인사하는 꼬마들의 천진난만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온몸 가득 매캐한 나무연기가 배는 것이 조금 흠이긴 하지만(기차의 주 동력이 맹글로브 나무다) 모든 것을 잊고 느긋한 반나절을 보내기엔 최적의 스케줄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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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는 일몰 속에 저물고 |
사실 긴 코 원숭이보다도, 북 보르네오 열차보다도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봐야한다’고 입 모아 칭송하는 것은 일몰풍경이다. 오전 내내 독야청청하며 진정됐던 마음이 저녁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다시 사정없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세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시내에 위치한 보르네오 1945 박물관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이 카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군이 상주했던 곳으로 현지인들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아 플레이스’로 불리고 있다.
소탈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내처럼 한가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현지 커피는 한 모금만 마셔도 한 잔을 다 마신 듯 쓰고 달아서 곁들어 나오는 중국식 빵을 먹어야 맛의 조화가 잘 맞는다. 그 유명한 일몰을 수트라 하버 리조트 앞에서 볼까, 멍카봉 강에서 볼까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버스를 타고 코타키나발루에서 45분 거리에 위치한 멍카봉 강으로 이동했다. 멍카봉 강은 수상식물인 맹그로브 나무가 대단위로 서식하고 있는 곳이자 바다위의 집시로 잘 알려진 바자오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종종 무지개, 그것도 쌍무지개를 목격할 수 있는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바틱 페인팅과 꽃게잡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는 수상가옥의 풍경도 나름대로의 운치를 자아낸다. 이곳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선셋 크루즈다. ‘크루즈’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배는 낡았지만 펼쳐지는 풍경은 천국처럼 낯설고 아름다운 어떤 그것이다. 그 천국은 교회 카탈로그에서 실린 에덴동산의 정형화된 풍경이 아니라 적막함과 쓸쓸함이 깃든 인간 세상의 천국이다. 하늘은 시시각각 고유의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Red’라는 단어로는 다양함을 표현하기 힘든 말 그대로 장관이다. 울컥, 마음을 할퀴는 바람소리를 듣는다. 먹먹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늘을 보지만 온 하늘은 핏빛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진정으로 아파본 사람만이 치유될 수 있다고 했던가. 두 눈을 감는다.
놓쳐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의 생채기들이 한곳에 모여 쓰린 신음소리를 낸다. 하지만 괜찮다. 더 이상 비겁하게 상처를 세월이란 파운데이션을 덕지덕지 바르고 억지웃음을 짓느니 차라리 쓰린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다시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아파하는 게 낫다. 그것이 인생. 그러나 신이 있다면 부디 이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게 해주기를 기원해 본다. (이정은 경기 용인시 상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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